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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G현장] 깎신, 내 이름은 주세혁
*헤럴드스포츠는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을 맞아 아시안게임뉴스서비스(AGNS)의 협조로 주요 현장기사를 소개합니다. 아시안게임 및 AGNS 기사에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30일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단체 결승전. 관중으로 꽉 찬 경기장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관중들의 눈동자만이 공을 따라 바삐 움직이고 있다. 탱-탱, 탁구공이 테이블에 튕기며 내는 소리가 더욱 요란해진다. 랠리의 연속. 이제는 끝내야겠다 생각했는지 중국의 마롱, 회심의 스매싱을 날린다. 깎기. 다시 한 번 강력한 드라이브를 날리지만 번번이 막히고 만다. 한국 선수는 끈질긴 수비에 지친 중국에 갑작스러운 공격을 펼친다. 당황한 마롱 제대로 받아치지 못한 채 허공으로 탁구공을 날려버린다.


견고한 만리장성에도 기죽지 않는 남자가 있다. 말이 세계 3위이지, 오랫동안 세계 1위였고, 현역 최고의 공격수로 꼽히는 마롱을 당황하게 만든 이는 바로 주세혁(34)이다. 그는 탁구 역사 상 수비전형으로는 유일하게 세계랭킹 10위 이내 든 살아 있는 전설과 같은 선수다. 탁구 커트에 '신'이 있다면 그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별명 '깎신'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2003년 세계선수권 남자단식 준우승(역대 한국의 최고 성적)을 비롯해 은메달만 가득한 주세혁은 이날 패배로 4번째 은메달을 땄다. 하지만 한국의 1장으로 나와 1시간 가까이 선보인 그의 탁구쇼는 아쉬움을 넘어 감동을 선사했다. 후배들이 부진했기 때문일까, 이미 인터넷에는 그가 태극마크를 더 달아야 한다는 의견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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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혁의 카카오톡 프로필사진. 가족들과 함께 있는 그의 표정이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참고로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 글귀는 '뭐어때 내 맘대로'이다. 남들이 뭐래도 자신의 깎는 탁구를 한다는 뜻일까?

탁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주세혁은 1980년생으로 우리나이로 서른 다섯살이다. 하얀 피부와 충실한 자기관리 덕분인지 10살 이상 차이 나는 막내들 사이에서 외모도 그리 꿀리지 않는다.


그를 보면 나이에 한 번 놀라고 커리어에 한 번 더 놀란다. 만 18세인 1998년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발탁되어 본격적으로 '국대' 생활을 시작했다. 2003 파리 세계선수권에서 남자 단식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2006 도하 아시안게임부터 광저우, 런던, 올해 인천까지 단체전에서 4개의 은메달을 땄다. 모두 만리장성에 막혔다.


남자선수로는 경쟁력이 없다는 수비전형으로 무려 16년간 중국이 자랑하는 최고공격수들의 파워드라이브를 깎고 또 깎았다. 그의 경기는 늘 하이라이트다. '어떻게 저 볼을 깎아서 받아낼까'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래서 해외에서 인기가 높다. 신기의 커트를 보고 싶어하는 탁구팬들이 많아 성적과 상관없이 초청료는 최상위권이다.


희귀병을 넘어
2012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원인 모를 통증 때문에 기본적인 훈련조차도 참여 할 수 없었다. 단순한 염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속적인 치료에도 병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부검사를 실시했다. 병명은 이름도 낯선 ‘류마티스성 베제트’였다. 혈관이 만성적으로 붓는 이 병은 염증이 오래간다. 진단조차 어려운 희귀병인 만큼 잘 낫지 않고 만성적인 통증이 동반된다.


갑작스러운 희귀병 선고에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들었다.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동료와 아내 그리고 팬들의 응원에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섰다. 약을 복용하며 나선 런던 올림픽에서 단체전 은메달을 땄다.


주세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랜 시간 국가대표로 뛰며 여러 개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사실에 운이 좋다고 이야기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결코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그 피나는 노력을 결실로 맺는 운동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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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런던 올림픽 때도 주세혁은 단체전 은메달을 땄다. 그의 은메달 인생은 그의 탁구만큼이나 끈질기고, 처절하고, 그리고 감동적이다.

깎신은 걱정한다

대표생활 16년 차, 개인전 메달 욕심이 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겸손했다.


9월 25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개인적으로 메달을 따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국가적으로 탁구가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는 게 먼저다. 거의 낭떠러지 수준이라고 본다.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이번 대회가 정말 중요하다”며 한국 탁구를 향한 쓴소리를 전했다.


또 30일에 치렀던 중국과의 남자 단체전 결승에서 패한 뒤에도 그는 “과거에는 한국과 중국이 1위를 놓고 다툼이 치열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을 따라 잡기 힘들다. 중국은 탁구를 프로화시켜 어릴 때부터 훈련시키는 시스템이다. 우리나라도 학교체육에서 클럽체육으로 바꾸고 고급기술을 미리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다시 중국을 따라 잡을 수 있다”며 암담한 현실에 대한 해결책부터 먼저 고민했다.


주세혁에게는 아직 개인 단식이 남아 있다. 8강에서 중국 선수와 맞대결을 펼칠 예정이지만 이 정도 선수에게는 이미 결과가 전부는 아니다. 이기든 지든 처절하게 깎아대는 그의 탁구를 동시대에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은메달 깎기 인생, 주세혁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때다. [수원=노유리 기자(AGNS)]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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