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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안나 카레니나’ 이지혜, 출구 없는 팔색조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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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배우 이지혜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김희윤 기자] “어렸을 땐 사극 배우가 꿈이었어요. 엄마가 밖을 나서면 집에서 한복을 꺼내 입고 사극 톤으로 연기하고 그랬죠. 기회가 되면 꼭 예쁜 한복을 입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안 되는 게 없다.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던 찰나에 말 한 마디도 사려 깊고 조리 있게 한다. 단연 ‘사기캐(사기캐릭터)’다. 뮤지컬 배우 이지혜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의 소유자다.

■ 한 배우 두 얼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에서 이지혜는 ‘키티 세르바츠카야’ 역을 맡았다. 그는 2012년 ‘지킬 앤 하이드’로 데뷔해 ‘레베카’ ‘베르테르’ ‘스위니 토드’ ‘팬텀’ 등 굵직한 작품으로 활동해온 배우다.

“오디션을 볼 땐 아직 소설을 접하지 못한 시점이었어요.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로만 만났었죠. 연극적인 무대를 차용해 풀어낸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연출적인 면을 상상하니 뮤지컬로 만들어지면 더 멋있겠다고 생각했죠. 이런 점에 큰 매력을 느꼈지만 국내 초연이라 부담되는 점은 있었어요. 대본도 직번역 상태인데다 고전이라 생소한 단어들도 많았죠. 결국 박칼린 예술감독을 비롯해 배우들과 함께 상의하며 작업에 임했어요”

그가 연기하는 키티는 작품에서 주인공 안나와 대비되는 사랑을 보여주는 역할이다. 여기에 전설적인 소프라노 패티 역까지 맡아 1인 2역을 소화해낸다.

“키티와 패티 모두 사랑하는 역할이에요. 서로 가진 매력도 다르죠. 키티는 실제 내 모습과 많이 닮아있어요.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밝은 매력을 지녔죠. 반면 패티는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에요. 작품에서 패티는 당대 최고의 프리마돈나죠. 원래 성악을 꿈꿔온 터라 역할 자체가 가슴 속에 묻어둔 꿈을 실현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는 키티와 패티 두 역할을 소화하며 현재와 이상을 모두 만끽한다. 두 역할을 소화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이미 뛰어넘은 지 오래다.

“키티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지만 밝은 아가씨에요. 무도회에서 파혼당해 상처받지만 나중에는 진실한 사랑을 하게 되죠. 성숙한 모습으로 새 사랑을 만나는 여정이 펼쳐져요. 소녀에서 숙녀로 나아가는 과정을 표현할 수 있어 즐거웠죠. 이를 중점으로 캐릭터를 그려내기 위해 오드리 햅번이 나오는 영화를 많이 참고했어요. 영화를 보면서 내가 직접 배역이 되고, 그 사람 자체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몸짓부터 특성까지 많이 연구했죠. 일단 내 스스로와 캐릭터의 중간 지점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어요”

키티의 여정에는 많은 드라마가 담겨있다. 그는 진실한 사랑의 대변자 키티를 연기하며 가장 중요한 넘버를 소개했다.

“‘아임 리빙 히어(I'm Living Here)’라는 솔로곡이 있어요. 짧고 단순한 멜로디지만 ‘이곳에서 나는 삶을 느낀다’는 말처럼 키티의 여정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곡이죠. 키티는 사랑에 상처받고 단단해지는 가운데 노래를 통해 많은 변화를 보여주는 여자에요. 점점 변해가는 안나와의 대비도 확연하게 차이나죠. 원작자인 톨스토이도 서로 다른 두 캐릭터를 통해 이러한 대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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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배우 이지혜


■ 무겁지 않지만 묵직한 작품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전이라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원작이 무겁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는 뮤지컬조차 진입장벽이 높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러나 어떤 장르든 주로 사랑을 그려내잖아요. 전에 ‘오필리어’라는 작품을 하면서 사랑이라는 정서는 모든 사람들이 가진 본능이고 우리 삶에 녹아있는 거라고 느꼈죠. 단지 시기가 달라 옛날 것처럼 느껴질 뿐이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느낌은 비슷하잖아요. 멀면서도 친숙한 느낌. 그런 게 아닐까요?”

그의 말마따나 ‘안나 카레니나’에서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사랑이다. 작품은 귀족부인 안나 카레니나와 젊은 장교 브론스키의 사랑을 통해 인류 보편의 문제들을 다룬다. 그러나 안나의 사랑은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규범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결국 안나는 시대에 도전을 받고 파국에 이르지만, 한 여인의 진솔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달라요. 작품마다 다른 형태죠. 모든 배역의 관점에 따라 사랑의 감정이나 결이 다르게 표현돼요. 그중 안나라는 캐릭터를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지는 장면들이 있죠.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다면 사랑을 좇는 안나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실제 현실이 되면 다가오는 느낌은 확연히 다를 거라 생각해요”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결코 무겁지 않다. 그러나 묵직하다.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많은 가지가 뻗어나가듯 다양한 결을 보여준다.

“작품의 메시지는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키티와 레빈을 보면서 착하게 살면 해피엔딩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죠. 개인적으로 오페라 장면의 안나를 보며 ‘저 여자가 비난받아 마땅한 짓을 했다고 감히 누가 자신만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어요. 그동안 나만의 잣대로 누군가를 평가하지 않았나하고 생각하며, 사람들도 이러한 질문을 던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안나 카레니나’는 고전 작품임에도 입소문을 타고 있다. 한국에서 성공한 러시아 라이선스 뮤지컬로는 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엔 배우들의 호연도 한몫했다.

“배우, 댄서, 앙상블 모두 퍼즐 맞추기처럼 끼워져 연습하다보니 너무 바빴어요. 다들 5분 정도 잠깐 쉬고 다시 연습에 매진하니 안쓰러울 정도였죠. 그렇지만 연습과정이 어려울수록 더 단단해져요. 갈수록 호흡도 잘 맞았죠. 그러다보니 공연도 훨씬 즐거워졌어요. 무대 위는 항상 즉흥이라 실수에 노출되는 상황들이 종종 있지만 다들 자연스럽게 모면하려고 노력하죠. 초연이고 배우들이 열심히 준비한 만큼 관객 분들로부터 ‘역시 초연배우들이 최고였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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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배우 이지혜


■ 부끄럽지 않은 배우를 꿈꾸다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대결절이 온 적이 있어요. 아마 그때가 가장 우울한 시기였죠. 어려서 더 극단적이었겠지만 나라는 존재 자체가 굉장히 무의미해진 느낌이었어요. 전이나 지금이나 노래를 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성악을 전공하던 이지혜는 돌연 뮤지컬 배우가 됐다. 그것도 2012년 ‘지킬 앤 하이드’라는 큰 작품에서 엠마 역할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대학생 때 우연히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매력을 느꼈어요. 일단 노래를 너무 좋아했지만 연기도 하고 춤도 출 수 있다는 점이 좋았죠. 뮤지컬 배우를 하면 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막연하게나마 꿈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오디션을 보게 됐죠”

‘지킬 앤 하이드’의 신인이 어느덧 ‘안나 카레니나’에서 가장 중요한 두 배역을 소화한다. 그것도 연기와 노래로 서로 다른 배역의 맛을 살릴 줄 아는 배우가 됐다.

“전작 ‘레베카’에 이어 다시금 인연을 이어가는 주현 언니가 많이 챙겨주고 연기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요. 미도 언니와는 작품을 하면서도 배울 점이 참 많았죠. 마찬가지로 공연을 거듭하며 누군가에게 좋은 배우이자 좋은 언니가 되고 싶어요”

그는 뮤지컬 배우를 일이나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뮤지컬 배우라는 직업은 있으나 결코 일을 한다는 느낌을 받진 않는다. 다만 무대에서 살아있을 뿐이다.

“뮤지컬 배우는 나라는 사람이 구체화되거나 없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등 수많은 역할놀이를 해요. 무대는 재미있는 놀이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행복해져요. 연기를 좋아하는 만큼 무대 연기나 드라마 연기를 넘나들며 많은 도전을 해보고 싶죠. 특히 심오한 사랑이야기 속 단순하지 않은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요. 지금보다 나이를 먹으면 보다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배어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지금으로선 다른 모습으로 표현될 그때가 기대돼요. 한 캐릭터에 갇혀있기보단 팔색조 같은 매력을 지닌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는 다채로운 색깔을 가진 배우를 꿈꾼다. 지금의 모습과 다른 나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나아간다.

“10년 후에는 지금의 모습과 다른 나 자신을 만나보고 싶어요. 살다보면 오류를 범하는 순간들이나 내 잣대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지점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지금보다 성숙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나이를 먹을수록 어른스러워지고 싶죠. 난 언제 어른이 될까 고민하면 아마 그때쯤 어른이 돼있겠죠. 아직까진 스스로 배우라고 얘기하기도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뮤지컬 배우 이지혜라고 당당하게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cultur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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