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문다영 기자] 거장이 그리는 판타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올해로 데뷔 44주년을 맞은 박범신이 장편소설 ‘유리―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이하 ‘유리’)을 펴냈다. ‘유리’는 2016년 3월부터 7월까지 모바일 플랫폼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연재했던 작품으로 유랑자의 운명으로 태어난 유리(流離)라는 남자의 생을 그려낸다.

‘아버지’를 죽이고, 살아남기 위해 떠돌이가 된 남자의 운명과 인류의 역사 속 ‘난민’의 이미지가 맞물리며 전개된다. 저자 특유의 문장들은 ‘유리’의 이미지와 결탁해 감각적이고도 독특한 서사를 흡인력 있게 끌어간다.

근대화 과정의 풍운에 휩싸인 수로국 소년 유리는 일곱 살에 천자문을 떼고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고 화인국의 글자도 읽고 쓸 정도로 영특한 아이다. 하지만 그는 큰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정한 장면을 목격한 뒤로 키가 자라지 않는다. 화인국의 수로국 침탈에 크게 협조하며 자작 작위까지 받은 큰아버지는 어느새 유리의 아버지가 된다. 열일곱 살이 된 유리는 아버지가 진행하던 사업에 자신이 관심을 갖던 붉은댕기 여자아이가 차출되어 떠나자 아버지의 죄를 벌하고자 그를 향해 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이후 그의 유랑이 시작된다.

작가는 ‘유리’를 통해 처음으로 판타지 기법을 차용한다. 그 덕에 그동안 발표해온 장편들과 전혀 다른 이미지를 선사한다. 구렁이, 은여우, 원숭이, 햄스터 등의 동물들은 유리의 여정에 동반자로 등장하며 유리가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서커스단 외다리 여인과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나 사막에서 만난 큰마님의 귓병을 치료하는 마법 같은 장면 등 영화를 떠올리게 할 만큼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책을 꽉 채우고 있다.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진정한 자유란 머물지 않고 묶이지 않는 삶에 깃드는 것이며 평생토록 아나키즘의 삶을 지향해온 꿈을 이 소설에 녹여냈다”고 고백한다. 박범신 지음 |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