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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다영의 읽다가] 스스로의 파괴를 '권리'라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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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아마도 내일은' 스틸컷)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문다영 기자] 세계적인 명문대를 나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충실히 살아가며 책을 쓰고 비영리 단체와 기업을 홍보하고, 유명 방송사 뉴스 제작에도 참여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 전 작고한 아버지의 친구가 아버지가 썼던 편지 수십 통을 보내온다. 남자는 흔들린다. 30년 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질문이 살아 꿈틀댄다.

남자의 아버지는 30년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는 대체 왜 죽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한 남자는 뒤늦게 발견한 아버지의 편지들에서 아버지가 자살에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그 이유는 한 가지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유전자로 풀어낼 수 없는 한 사람의 죽음.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살은 법을 어기는 행위인지, 자살을 돕는 일은 법을 어기는 행위인지, 어떤 사람들이 자살하는지, 자살률이 가장 높은 요일과 장소는 어디인지 등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왜 자살하는가’라는 책을 내놓은 에릭 마커스는 어떤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자살한 이들의 유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까지 조명하며 자살의 위험성과 원인을 찾고자 노력한다. 아마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막을 수 없었던 죽음에 대한 해답을 풀고자 했으리라.

그러나 그 해답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 인간이 자살하는 이유를 명확히 아는 건 신 뿐일 수도 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조차 자신이 왜 죽으려 하는지 모를 수 있다. 어쩌면 스스로 생을 선택할 수 없었던 이들이 스스로 고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일지도 모른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바로 그런 점을 직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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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스틸컷)


무엇보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바로 자살 조력자다. 실체인 인물인 듯, 자살자들의 환상인 듯 존재하는 그. 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이라도 기미가 있는 이들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그들이 ‘안식’을 찾도록 유도한다. 그 행위는 그에게 있어 예술이며 그러한 사람들은 그에게 고객이 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얻는가? 여행지에서 만난 한 여자의 질문에 그는 자신이 “지옥에 있다”고 답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객들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쓴다.

자살 조력자가 고객을 소재로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을 쓰는 이중구조는 독자의 몰입도를 높인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와 미미, C는 이 세상에서 끝도 모를 불안과 권태를 느끼며 휴식을 갈구한다. K는 빼앗기는 인생만 살다 이룰 수 없는 꿈에 모든 걸 체념한 상태다. 세상 어디에도 그들의 마음이 쉴 수 있는 안식처는 없다. 그저 그 불안한 마음을 외면하고 도망치며 살아왔을 뿐.

타인의 자살을 유도하고 죽음의 순간을 바라보는 그와 네 사람의 이야기는 고작 134쪽에 담겨 있지만 그 강렬함을 두께와 비교할 수는 없다. 김영하는 29살에 쓴 자신의 첫 장편소설인‘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통해 퇴폐적이면서도 우아하게 네 인물의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그 안에 스스로 생을 끝내는 죄를 묻는 윤리나 “죽지 말라”는 설득은 없다. 오히려 그렇기에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134쪽 사이에 혹은 이후에 있어야 할 페이지들은 독자 몫이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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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책표지)


특히 표지를 넘기면 가장 처음 보게 되는 장 자크 다비드의 ‘장 폴 마라의 죽음’이나 구스타프 클림트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 등 그림들은 강렬한 이미지와 함께 작품과 맞물려 폭발적인 시너지를 낸다. 명화로 강렬한 인상을 안긴 김영하는 이후엔 자신의 힘으로 2차 충격을 선사한다. 거칠 것 없는 에너지와 역시나 시니컬하고 심드렁하기까지 한 문체들. 그림을 매개로 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자극적이고 강렬한 원색의 색채를 마음껏 휘두른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야기에 힘을 보태는 명화와 더불어 제목마저도 소설가 프랑수와즈 사강이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됐을 때 법정에서 남긴 말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김영하는 마치 그 예술가들의 영혼을 집어삼킨 듯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다.

다만 그가 그리는 죽음의 미학은 철저히 환상이다. 현실에서의 죽음은 그렇게 섣불리 단정 지을 수도, 쉬울 수도 없다. 어떤 이들에겐 쉽게 죽는 것마저 호사인 경우도 있다. 이를 두고 작품 출간 년도인 1996년, 세기말적 분위기를 언급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를 감안하고라도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소설에 가깝다. 대담하고 실험적인 면에 감탄하면서도 뒷맛은 씁쓸하다.

책은 가방에 쏙 들어가는 판형이며 앞서 말했듯 무척 얇다. 정말 장편소설인가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두께인 만큼 금방 읽힌다. 요즈음 김영하의 것보다 템포가 빠르고 거칠 것 없는 문체들은 속도감을 높인다. 이야기의 강렬한 인상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다면 끊어 읽기보다 단번에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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