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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네;뷰] 왜 ‘아수라’는 실패의 갈림길에 내 몰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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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문화팀=김재범 기자] 아직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과정으로만 보면 사실상 실패에 가까운 숫자다. 충무로에서 활동 중인 감독들은 아마도 하나 같이 입을 모았을 것이다. 김성수 감독을 가리켜 ‘천운을 타고 난 연출자’라고. 정우성 황정민 곽도원 주지훈 정만식 등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라인업을 구축해 냈으니 말이다. 영화 ‘아수라’는 밑그림을 짐작하더라도 아니 겉그림을 곁눈질로 보더라도 ‘흥행’ 여부를 논할 대상이 아니었다. ‘대체 얼만큼의 관객을 끌어 모을까’에만 집중된 결과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개봉 2주차에 접어든 현재까지의 성적은 참담하다. 결코 속지 않은 관객들의 냉정한 판단일지. 아니면 예상 밖의 암초가 만들어 낸 헛발질인지는 그 속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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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우성의 잘못인가 한도경의 잘못인가

가상의 도시 안남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지옥 같은 굴레의 삶은 비리 경찰 한도경을 옥죄는 쇠사슬이다. 그 쇠사슬의 쇠붙이 고리는 각각 박성배 시장(황정민), 김차인 검사(곽도원), 도창학 수사관(정만식) 그리고 후배 형사 문선모(주지훈) 등 다양하다. 한도경은 빠져 나올 수도 빠져 나와서도 안되는 굴레에 갇힌 먹잇감이 됐다.

영화의 스토리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한도경은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가 왜 벗어나야 하는지 나아가 ‘아수라’로 불리는 극 안에서 어떤 목표를 갖고 존재하는지가 불명확하다. 결론적으로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본 뒤 극도로 나뉘는 호불호의 이유가 발생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말기암 아내를 치료하고 싶은 것인지(사실 이 지점이 가장 설득력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니면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생활 패턴 자체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인지. 그것도 아니면 관객들이 모르는 영화 결말까지 이르러서야 밝혀지게 되는 제3의 목표가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물론 관객들은 한 가지를 두고 ‘그럴 것이다’란 짐작만을 하게 된다. 이 영화가 ‘느와르’ 이기에. 그 장르가 캐릭터를 소화하는 방식을 떠올리고 한도경의 결말을 유추할 뿐이다.

결정적으로 한도경이란 인물이 각각의 인물을 만날 때 구체적인 의도가 나오지 않게 되버린다. 박성배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고 싶은 것인지. 하지만 그의 돈에 굴복하는 이중성은 무엇을 말하는지. 김차인의 권력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의 끄나풀 역할을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자신의 비리를 손아귀에 쥐고 협박하는 힘의 논리인지. 도창학의 폭력에 저항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지점이 마초근성의 한 끄트머리인지. 문선모의 변화를 변절로 보는 것인지 선택으로 보는 것인지.

결과적으로 한도경의 목적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흐려지게 된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 집중하지만 강렬한 잔상만을 기억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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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이유…드러나는 허술함

처음부터 끝까지 워낙 강렬한 비주얼로 일관하는 영화이기에 생략과 압축은 미덕으로 포장될 요소가 다분하다. 물론 일부 관객들이 강함으로만 일관된 스토리의 중독성에 취해 빈약해진 개연성을 잊고 지나간다면 각본가 혹은 연출자에겐 더 없는 ‘신의 한수’가 될 듯하지만 말이다.

‘아수라’의 또 다른 문제가 바로 그 지점이다. 한도경의 목적성과 이유가 배제된 것이라면 그가 주인공이어야 할 이유가 없었단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표면적으로 ‘아수라’는 5명의 캐릭터가 극 전체를 이끌어 가지만 실질적인 화자(話者)는 한도경이다. 목적과 이유가 사라졌기에 박성배와 김차인 사이를 오고가며 줄타기를 하는 그의 행동 자체가 설득력을 떨어트린다.

결과적으로 스토리의 구성력 자체에서 문제가 있었음을 스스로 밝힌 꼴이 된다. 한도경의 눈에 비친 ‘지옥의 수라도’가 처음 시작된 순간부터 과정 그리고 결말의 단계 그리고 그 안에서 힘의 논리를 펼치는 박성배와 김차인 그리고 도창학과 문선모의 존재감 비율 배분에 실패한 것이다. 힘을 갖고 있는 박성배와 김차인 그리고 힘이 없는 한도경 그 사이에 낀 도창학과 문선모. 이들의 관계성에 집중하고 스토리를 구성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다른 방식이었더라도 지금의 ‘아수라’보다는 더 한 지옥도가 펼쳐지는 밑그림이 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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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적성과 관계성이 사라진 스토리…“남은 것은?”

주인공이 필연적으로 갖고 가야 할 목적과 스토리 전체를 구성하는 캐릭터간 관계의 연계가 희미해졌다. 결과적으로 ‘아수라’에 남은 것은 지옥 같은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강렬함 뿐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상처 난 얼굴과 혈흔이 낭자하는 이미지의 연속 그리고 욕설을 통해 마초의 근성을 대신하려고 한다. 강함이 곧 남자의 상징성으로 대변되는 일반화의 오류가 연이어 등장한다. 급기야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인 이들의 살육전은 강렬하고 충격적일지언정 느와르 장르의 진한 여운을 유지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감정을 증발시켜버리기까지 한다.

소리지르고 윽박지르고 피가 튀고 그리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곧 악인과 마초의 세계라고 부르짖는 러닝타임의 전부가 됐다.

추가적으로 박성배 시장이 왜 그토록 재개발에 목을 맸는지, 김차인이 왜 그토록 박성배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됐는지, 문선모는 적당한 정의감을 버리고 그 반대의 입장에 자신을 순식간에 담궈 버렸는지, 도창학은 인간성과 악마성의 중간 지점에 서 있지만 끝까지 자신의 인간미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영화는 외면한다.

단지 지옥을 위해 이들의 생각과 이유 그리고 목적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단 것처럼.

총 제작비 120억원의 ‘아수라’ 손익분기점은 약 350만 내외다. 지난 달 28일 개봉 이후 5일까지의 누적 관객 수는 221만 9233명. 5일 일일관객 동원 수는 6만 2286명. 전일 대비 관객 감소율은 -20%다. 개봉일인 지난 달 28일 오프닝 스코어 대비 관객 감소율은 무려 -80%를 훌쩍 넘어섰다.

cultur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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