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실존 인물 연기하며 느낀 감정의 굴곡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개봉 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손예진은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밝은 ‘손예진’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 속 한 켠에는 분명 굴곡의 삶을 살다간 비운의 여인이 남아 있었다.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여운이 이 여배우를 사로잡고 있는 듯 보였다. 데뷔 이후 20여편 남짓의 영화를 경험했지만 이번 영화는 정말 특별해 보였다.
“이번 영화는 정말 좀 특별한 것 같아요. 영화를 보면서 제가 스스로 울컥하고 눈물을 흘려본 것도 처음이에요. 정말 기분이 묘했어요. 창피하기도 해요(웃음). 제가 제 연기보고 그랬다고 어휴 닭살 돋아서 하하하. 그냥 아직까지 어떤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배우라면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요. 흥행 안되면 어쩌지 등등. 이번에는 좀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분명히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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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어떤 특별한 교훈을 말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글쎄요. 그냥 인생에 대한 영화라고 하고 싶어요. 그저 그렇게 사실 수밖에 없었던 그 한 여인의 세월이 같은 여자로서 너무 가슴 아팠어요. 독립운동을 하는 멋지고 훌륭한 분들도 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사람들이 더 많았잖아요. 그런 세월 속에 이 여인은 어떤 고통을 짊어지고 살았을까. 그 얘기 같아요.”
‘덕혜옹주’의 삶에 오롯이 집중한 얘기는 자칫 오해의 시선을 낳을 수도 있었다. 손예진도 그 지점을 잘 알고 있었다. 연출을 맡은 허진호 감독은 더욱 그러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의 수위와 표현의 방식에 따라서 이 얘기는 오해로 갈 수도 있었다. 반대로 이 영화의 본질을 살릴 수 있는 포인트가 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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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지만 격정적인 감정의 진폭도 이 영화는 분명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위가 넘어가는 지점에서 영화는 한 발씩을 뺐다. 혹은 보폭의 반을 줄이는 영민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 지점은 당연하게도 또 그럴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멜로의 대가로 불리는 허진호 감독의 연출력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감독님의 그 지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사실 여러 장면에서 배우들이 ‘조금 더’를 생각했어요. 조금 더 나아가도 감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럴 때마다 감독님은 ‘아니다’고 선을 그어주셨죠. 또 배우들이 끝까지 감정을 끌어 올려 찍은 장면들도 많아요, 그런데 완성된 영화에선 다르더라구요. 편집으로 통해 분명히 색깔을 내주셨죠. ‘덕혜옹주’가 성공을 거둔다면 허 감독님의 힘이 절반 이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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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로 처음 접했죠. ‘감독님이 그런 얘기를?’이라고 했어요. 되게 이상했어요. 아니 신선했다고 하는 게 맞겠죠. 대체 감독님이 만드는 ‘덕혜옹주’는 어떤 영화일까 궁금했어요. 그냥 그렇게 관심이 가는 기사를 본 뒤 몇 년이 흐른 것 같아요. 사실 기사로 처음 접했을 때도 생각 했지만 ‘만들어 지는 게 쉽지는 않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한 여자의 삶에 대한 얘기인데. 충무로의 트렌드와는 좀 먼 얘기잖아요.”
하지만 돌고 돌아서 그렇게 우연히 접했던 ‘덕혜옹주’는 손예진의 손으로 들어왔다. 거짓말과도 같은 얘기지만 사실이었다. 손예진 스스로도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이 영화가 결국 자신의 앞에 오자 묘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허진호 감독을 만난다는 즐거움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운명을 느낀 것이었는지 그는 출연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옳았음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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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행복한 표정이었다. 믿음이 결국 확신으로 변하게 된 것을 확인했기에 그는 즐거웠을 것이다. 눈에선 즐거움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슬프고 웃을 수 없는 설명되지 못할 감정이 묻어 나왔다. 그는 영화 속에서 유독 자신을 끌어당긴 한 장면을 꼽았다. 영화 마지막 장면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 눈물 날 것 같아요. 휴. 실제 자료 사진을 봤어요. 그때 ‘덕혜옹주’의 표정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어요. 동공에 초점이 없더라구요. 슬픔? 고통? 아픔? 그런 것이 아니네요. 그냥 텅 빈 느낌이었어요. 대체 뭐가 이 여인을 이렇게 만들었지? 갑자기 그 장면에서 저도 빠져 나오질 못하겠더라고요. 그저 슬픔도 아픔도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에 저 역시 미칠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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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황녀란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에요. 그저 비극의 역사에서 한 여인의 삶이 통째로 사라졌잖아요. 그 세월의 아픔이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참 어렵지만 그 지점을 조금은 느끼신다면 영화 ‘덕혜옹주’의 존재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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