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에너빌, 뉴스케일파워·X-에너지 투자·모듈 공급 계약
국내 유일 원전 주기기 제작…SMR 성장성·경쟁력 기대
5년간 SMR 62대 수주 목표…AI 전력 폭증에 추가 가능성
생산시설 확충·적기 투자 필수…밥캣 분할로 1조 재원 확보
박정원(왼쪽 첫번째) 두산그룹 회장이 지난달 14일(현지시간) 체코 플젠 시에 위치한 두산스코다파워를 방문해 원전 핵심 주기기인 증기터빈 생산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두산 제공] |
[헤럴드경제=정윤희·한영대 기자] 최근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최우선 관심은 청정 전력에너지 확보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접어들며 ‘전기먹는 하마’인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기존의 에너지원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해진데 따른 것이다.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데이터센터 대비 2배 이상의 대규모 전력을 소모하며 24시간 끊기지 않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 또한 필수다. 여기에 2030년 넷제로 달성을 위해서는 무탄소 청정에너지원 확보가 핵심 과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데이터센터 소요 전력의 급격한 증가로 2022년 53GW였던 전력 수요는 2026년까지 약 2.3배 늘어난 114GW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이 선택한 해법은 원자력, 그 중에서도 소형모듈원자로(SMR)다. SMR은 안정적인 에너지 생산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기존 원자로 크기를 대폭 줄여 효율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오픈AI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빅테크 기업들이 잇따라 SMR 지분 투자, 전력 계약 소식을 쏟아내는 이유다. 영국과 루마니아, 우리나라 등 주요 국가들도 SMR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글로벌 SMR 성장 추이 전망 |
이에 힘입어 두산에너빌리티는 국내외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국내 혁신형 SMR(i-SMR) 개발에 참여하고 있으며 미국 뉴스케일파워, X-에너지에 지분 투자 및 주기기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미국 및 글로벌 시장에 SMR 모듈을 납품할 예정이다. 이들 외 다른 SMR 업체와의 대화, 협의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구글, 아마존 등의 SMR 계약 소식이 속속 전해지며 이번 주 들어 두산에너빌리티의 주가도 요동친 이유다. 아마존의 X-에너지 5억달러 투자 소식이 전해진 지난 17일에는 주가가 8.68% 급등하며 2만1150원에 장을 마감키도 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주가가 2만원을 넘어선 것은 지난 7월22일 이후 세 달 만이다.
박정원(왼쪽) 두산그룹 회장과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회장 [두산 제공] |
SMR에 투자한 여러 국내 기업들 가운데 두산에너빌리티가 특히 주목받는 것은 국내 유일의 원전 주기기 제작 업체라는 점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SMR을 통한 전력 공급 계약이 늘어날수록 수주 가능성, 주력 사업과의 시너지 효과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원전 설비 사업은 ▷대형원전 주기기 ▷SMR 사업으로 구성돼있다. 원자로, 증기발생기 등 원전 핵심기기를 주단소재부터 최종시험까지 일괄적으로 생산할 수 있으며, 창원 공장 안에 소재 공장과 기자재 공장이 통합돼있어 효율적인 제작이 가능하다. 최근 대형원전 부문에서도 한국수력원자력이 주축이 되는 ‘팀코리아’ 일원으로 체코 두코바니 원전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며 성과를 냈다. 최종 계약에 성공할 경우 약 8조원 가량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재계 한 관계자는 “하나의 원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설계, 에너지 운영 등 모두 중요하지만 핵심은 원전 건설 과정에서 적용되는 주기기와 부품”이라며 “SMR 시장에 많은 국내 기업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원전 주기기는 물론 SMR 모듈을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생산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두산에너빌리티가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두산에너빌리티 창원 공장에 마련된 소형모듈원자로(SMR) 부품 제작 설비 전경. [두산에너빌리티 제공] |
▶회사 존망 위기에도 투자 결단…“망설이면 생존 힘들다”=두산에너빌리티는 1962년 설립된 현대양행을 전신으로 하며 공기업(한국중공업)으로 전환됐다가 외환위기를 거치며 민영화됐다.
두산에너빌리티가 SMR에 대한 투자를 시작한 것은 7~8년 전이며, 본격적으로 SMR에 뛰어든 건 2019년이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두산에너빌리티는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여파로 핵심 사업인 원전 수주가 급감, 실적이 곤두박질 친 것이다.
탈원전 정책으로 신한울 3, 4호기를 포함한 신규 원전 6기 건설이 백지화 됐는데, 이에 따라 사라진 두산에너빌리티 매출은 7조~8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원전 설비 공장가동률도 2017년 100%에서 2020년 50%까지 떨어졌으며, 2007년 11월 19만1500원까지 올랐던 주가는 2020년 5000원대까지 급감하기도 했다.
유동성 위기에 임직원들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도 받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탈원전 초기 2017년 6월말 기준 7681명에 달했던 임직원 수(기간제 근로자 포함)는 2021년 6월말 5484명까지 줄어들었다. 탈원전 시기 동안 실적이 악화되면서 희망퇴직을 단행한 결과 약 2000여명이 회사를 떠난 것이다.
이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며 원전 정책 방향성이 180도 달라진 2022년부터 다시 인력 규모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올해 6월말 기준 두산에너빌리티 임직원 수는 6014명으로 전년 동기(5812명)에 비해 200명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존은 급증하는 데이터센터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X-에너지에 5억달러 투자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X-에너지는 두산에너빌리티가 500만달러를 투자한 SMR 기업이다. X-에너지 직원들이 SMR 컨트롤 룸에서 전력 생산 현황을 체크하고 있다. [아마존 뉴스룸] |
회사의 존망이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두산에너빌리티는 SMR에 대한 투자를 결정했다. 성장 가능성이 큰 시장에 대한 투자를 망설일 시 향후 시장 주도권을 차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계원자력협회는 글로벌 SMR 시장 규모가 지난해 기준 8조5000억원에서 2035년 640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가장 먼저 글로벌 SMR 기업에 지분 투자를 단행했다. 글로벌 SMR 기업들이 일감을 얻을 시 두산에너빌리티가 SMR 기자재를 공급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2019년 미국 SMR 설계 업체인 뉴스케일파워와 사업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맺은 이후, 국내 투자사들과 함께 4400만달러(604억원)를 투자해 지분을 확보했다. 2021년 6000만달러(823억원)를 추가 투자한 데 이어 뉴스케일파워 원자로 모듈에 대한 제작성 검토를 완료했다.
2021년에는 미국 SMR 개발업체인 X-에너지와 SMR 제작 설계 용역 계약을 맺었고, 지난해에는 지분 투자 및 핵심 기자재 공급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X-에너지에 투자한 금액은 500만달러(69억원)이다.
지난 9월 20일(현지시간) 체코 플젠에 있는 두산에너빌리티의 자회사 두산스코다파워에서 진행된 ‘한국·체코 원전 전주기 협력 협약식’에 윤석열 대통령(왼쪽 첫번째)과 페트르 피알라 체코 총리(오른쪽 첫번째)가 임석한 가운데 박지원(왼쪽 두번째부터) 두산에너빌리티 회장, 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다니엘 프로차즈카 두산스코다파워 최고운영책임자(COO)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 제공] |
▶SMR 성과 속속…향후 5년간 62대 수주 목표=과감한 투자에 따른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뉴스케일파워의 루마니아 SMR 공급이 가시화되면서, 두산에너빌리티가 핵심 주기기인 원자로 모듈을 제작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올해 4월에는 라우스 요하니스 루마니아 대통령이 두산에너빌리티 경남 창원 본사를 방문해 두산에너빌리티의 SMR 제작 역량을 살펴봤다.
생산능력 강화에도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올해 3월 창원에 SMR 전용 공장을 준공했다. 여의도 1.5배에 달하는 430만㎡ 면적에 쇳물 주조부터 원전 설비 완제품가지 일괄 생산 시스템을 구축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일감 확보 상황에 따라 증설할 계획이다.
박지원(가운데) 두산에너빌리티 회장과 클라우스 요하니스(오른쪽) 루마니아 대통령이 올해 4월 두산에너빌리티 경남 창원 본사에서 소형모듈원전(SMR) 생산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 제공] |
두산에너빌리티는 향후 5년간 62대의 SMR 모듈을 수주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레이저클래딩과 전자빔용접 등 첨단 제작 기술 확보, 전문 공장 구축 등을 통해 SMR 제작기간을 기존 17개월에서 3개월로 단축시키는 것이 목표다.
허민호 대신증권 연구원은 “대부분 SMR 프로젝트는 2030~2032년 첫 상용 원자로를 출시할 계획이며 아직 원자로 제조 프로세스가 축소되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2025년 하반기부터 두산에너빌리티의 SMR 관련 수주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최근 세계적으로 AI,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용 SMR 물량이 증가하면서 당초 5년간 62기의 SMR 모듈 공급 목표치 역시 대폭 늘어날 가능성도 크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향후 5년간 연 4기(총 20기) 이상의 대형원전, SMR은 5년간 연 20기(총 100기 이상) 규모의 제작시설 확충을 목표로 하는 상태다.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세계 최대 전자·IT 박람회인 CES에서 박정원 회장은 “AI 기술이 발전하려면 이를 가동하기 위한 대규모 데이터센터 설치가 늘 수밖에 없다”며 “SMR과 같은 차세대 에너지가 좋은 대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뉴스케일파워 소형모듈원자로(SMR) 플랜트 가상 조감도 [두산에너빌리티 제공] |
적기에 SMR 기기를 납품하기 위한 투자 재원 마련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위한 사업구조 상의 ‘선택과 집중’도 진행 중이다. 기존에 자회사였던 두산밥캣을 떼어내 두산로보틱스의 자회사로 넘기고, 두산에너빌리티는 주력 사업인 원전, SMR 등 발전설비사업에 주력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두산에너빌리티는 21일 이사회를 열고 회사를 인적분할 한 뒤 두산밥캣을 신설법인의 자회사로 두는 사업 개편안을 의결한다. 이날 이사회에서는 주주 반발의 핵심이었던 두산밥캣의 지분을 보유한 신설법인과 두산보틱스와의 합병 비율이 재조정될 전망이다.
앞서 두산그룹은 두산밥캣을 두산에너빌리티로부터 떼어내 두산로보틱스와 합병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주주들의 반발과 금융 당국의 압박에 철회했다. 다만, 두산밥캣을 분할해 두산로보틱스의 자회사로 두는 방안은 그대로 추진키로 한 상태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사업 재편으로 원전 사업 적기 도약을 위한 설비투자 재원을 확보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밥캣 분할에 따라 회사 차입금이 약 7000억원 감소하고, 외부 매각이나 차입에 활용하기 어려웠던 비영업용자산을 처분해 5000억언 규모의 현금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약 1조원 수준의 신규 투자여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분할합병을 통해 본래의 주요 사업인 SMR, 가스터빈 등 친환경 성장사업 및 대형원전을 비롯한 기존 에너지 사업 분야에 더욱 집중해 사업을 효과적으로 영위할 것”이라며 “사업 전문성 및 경영효율성이 강화됨에 따라 궁극적으로 회사 전반에 대한 재무구조 및 영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뉴스케일파워가 개발한 소형모듈원전(SMR) 모델 ‘VOYGR’. [뉴스케일파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