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때 전두환 신군부 쿠테타 세력의 총칼에 광주시민 등 193명이 항쟁 10여 일 사이 현장에서 숨지고 376명이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리고 행방불명자 65명, 부상자 3193명, 구속 및 고문 피해자 1589명으로 기록되는 5·18은 미증유의 사건이다.
그런 5·18을 두고 국민의힘 유력한 대선 경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전두환이 쿠테타와 5·18만 빼면 정치를 잘했다”는 발언이 일파만파다. 윤 전 총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호남분들도 그런 이야기 하는 분이 꽤 있다”며 확인 저격했다. 윤석열의 1일 1실언 시리즈로 치부하기엔 대형이다. 이번 5·18 발언은 호남사람들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망언 수준이다. 물론 본인과 캠프에서는 “앞뒤 전후 맥락을 자른 왜곡”이라며 SNS에 글을 올려 “대통령이 만기친람해서 모든 걸 좌지우지하지 않고 뛰어난 인재들을 기용해 국정을 시스템적으로 운영하겠다고 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윤 후보의 발언과 그 태도에 실망을 넘어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본인이 어떤 의도로 전두환 과거 행적을 소환했든 언론과 캠프 참모진들의 ‘잘못 했다’는 잇따른 지적과 진언에도 며칠간 아랑곳하지 않다가 마지 못해 유감 표명을 했다.
이쯤 되면 실언이나 망언이 아닌 특정 지역에서 반사이익을 얻기 위한 다분히 기획된 발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윤 전 총장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이낙연 후보가 낙마하면서 일부 흔들리는 호남 민심에 “나 찍지 마라”며 확실히 쐐기를 박은 셈이다. 호남은 30년 넘게 DJ에 볼모처럼 잡혀있다가 노무현, 문재인 정권에 이르기까지 속된 표현으로 몰 빵 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차기 대선부터는 이제 특정 당의 전유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조짐이 보였었다.
최근 대장동 사건을 보면서 더욱 그렇다. 선거 때마다 호남에서는 득표율이 거의 한 자릿수에도 미치지 못했던 보수 야당의 후신인 국민의힘으로서는 의미 있는 진전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윤 전 총장의 5·18 전두환 발언으로 그런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되었다. 최근 대선후보 지지도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 지표를 보면 호남에서는 민주당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60∼70%에 이르고 30∼40%는 야당 후보로 지지율이 분산되어 있거나 “지지 후보 없다”였다.
지난해 8월,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5·18 묘역을 찾아 무릎을 꿇고 참배했을 때 호남사람들에게는 용서와 화해의 시도로 비추어졌다.
국민의힘은 그 뿌리가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태동한 민주자유당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5·18의 한을 안고 사는 호남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손을 내밀 수 없는 정당이었다. 그럼에도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응어리진 한을 털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터에 윤석열 전 총장의 돌발 발언은 또 한 번 호남사람들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참 가혹하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도 오늘 오전 당 지도부와 여순사건 위령비를 참배한 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전두환, 5·18과 쿠데타 빼면 정치 잘했다'는 발언은 동의하기 어렵다"며 윤석열 발언 파문 잠재우기에 나섰다.
이 대표는 "당 대표실에 가면 전두환 대통령 사진만 없고 5·18에 대해 광주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노력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사진이 있다"면서 "전두환의 사진이 없는 것은 그분의 통치행위에 대해 기념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대선후보 지지도 1∼2위를 다투는 윤석열 전 총장의 5·18에 대한 역사 인식이다.
지난 11일 국민의힘 첫 대선후보 합동토론회 차 광주를 찾은 윤 전 총장은 5·18묘역을 찾아 방명록에 ‘아! 5·18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썼고 이보다 앞서 7월 중순에는 5·18묘역을 찾아 ‘광주는 헌법정신을 피로써 지켜낸 헌법수호 항거’라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전두환 찬양 발언이 튀어나온 것이다. 불과 일주일 전 발언과 반대된 발언이다.
5·18은 전두환 정권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무장 폭도들에 의한 내란과 폭동이라는 오명을 썼다가 그 후 민중항쟁 또는 민주화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러나 도청진압 작전이 전개된 5월27일 새벽 전일빌딩과 시민군을 향한 헬기 사격을 놓고 재판이 진행 중인 미완의 사건이다.
윤 전 총장이 선거의 유불리를 떠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5·18과 관련해 40년 전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을 소환하면서까지 전두환 찬양론자처럼 비추어지는 것은 안타깝다. 5·18에 대한 진실을 담은 책자는 차고 넘치니 다시 한번 일독을 권한다. 구차하게 궤변을 늘어놓지 말고 제1야당의 대선후보답게 광주를 찾아 이번 발언은 잘못되었노라고 정중히 사과하길 바란다.
호남취재본부 박준일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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