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으로서 ‘변방’을 지키고 싶고, ‘상화’는 상화대로 다른 손에 양보하고 싶지 않다. 두 개의 술잔을 갖고 어느 술잔을 마셔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다.”
고은 시인이 아내 상화를 향한 사랑가 ‘상화시편: 행성의 사랑’(창비)과 ‘내 변방은 어디 갔나’(창비)를 동시에 내며 즐거운 소회를 밝혔다.
‘상화시편’은 팔순을 바라보는 고은 시인의 첫 사랑시집이며, ‘내 변방은~’은 ‘허공’ 이후 3년 만에 내놓는 시인의 시적 자유를 향한 여정의 또 하나의 봉우리다.
‘상화시편’은 지극히 사적이고 현실적인 범부의 일상의 사랑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나는 상화를 노래하기를 남몰래 꿈꾸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 인생 50년 동안 그런 사랑을 짓거나 읽는 일은 시인과 거리가 멀었다.
시인은 스스로 자신의 시를 1983년 이전과 이후로 가른다. 1983년 이후의 문학은 아내와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문학은 아내의 우물에서 시어를 길어올리는 일이었다.
사랑시들은 일상의 평화가 느른하게 담겨 있다.
“자전거에/상화를 태우고/상화남편은 견마 잡혔다/삼단 자전거 바큇살이 찬란했다/(…)/다음날부터 상화가 학교버스 내리면/입구에 나가 있다가/얼른 자전거에 태운다.( ‘자전거’ ) ”
“아직 녀석이 안 돌아온 저녁/둘의 식탁/마즙 한잔/물큰한 구운 토마토 서너 조각/쪄둔 찬 고구마 반 토막//무엇에 무엇을 더하겠는가/아내가 요구르트를 가져왔다//아!/행복의 탄식 하나가 나와버렸다.( ‘저녁 요구르트’ ) ”
아내라는 존재가 일으킨 변화는 생활에 머물지 않는다. 존재론적 전면적 변화로 이어진다.
“대문 밖에 누군가 빈 사이다병을 놓고 갔다/그것을 치운 뒤/아내를 기다리는 일이/내 착각의 시작이었다/나는 아내가 되어/돌아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아내가 되어간다’ ) ”
“나는 이십년 전보다 더 여자다.( ‘성도착에 대하여’ ) ”
그 변화의 끝에 다다른 건 하나 됨. 시인과 아내는 마침내 구별이 되지 않는다.
“자고 나자/나는 나의 아내였다/나의 눈은/아내의 눈이었다.”( ‘변신’ )
시인은 1983년 5월 5일 아내와 결혼했다. 영문학 박사인 아내와의 결혼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만남’이라고 백낙청 교수는 불렀다.
또 다른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는 시인 특유의 본래적인 것, 시원을 향한 뜨거움, 어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펄떡인다.
‘삼천리강산이 모조리 서울이 되어간다/오, 휘황한 이벤트의 나라/(…)/허브 짝퉁이 되어간//말하겠다/가장 흉측망측하고 뻔뻔한 중심이라는 것 그것이 되어/간다( ‘내 변방은 어디 갔나’ ) ”
“이제까지 내가 본 것/심연이 표상/심연의 가상 그것/아니/나라는 의식 몇년/순 가상 이것/이것들을/굳이 누더기로 꾸미지 말 것.( ‘가을 단장(斷章) ”
시인은 잠결에 ‘내 변방~’이 왔다고 했다.
그런 비예측성은 그의 시의 본질과 닿아 있다. 수억년 시간과 지금을 오가는 섬광 같은 것, 빅뱅의 에너지를 감춘 고요함이 시를 몰아간다.
떠돌기가 숙명인 양 지내온 시인답게 이번 시집도 많은 여정을 깔고 있다. 봉정암, 어청도 바다, 프랑크푸르트 공항, 담양, 거문도 등 곳곳에서 시는 태어났다.
그런 시공간의 자유로움 속에서 시인은 지금 이곳의 존재론적 당위성을 찾아낸다. “바람 속에서 첫 울음을 울어야 한다/석달 열흘 바람쳐/비바람쳐 살아야 한다/아, 이 세상에 이 세상의 이유인 아기가 있다.”( ‘그래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 ) ”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