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사는 허난성 남부의 작은 도시 신양에서 서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대소산(大蘇山)에 위치한 고찰이다. 허난성의 성도(省都) 정저우에서는 자동차로 6시간 남짓 걸린다. 남북조 시대의 명승 혜사(慧思 515~ 577)가 암자를 짓고, 수행하며 제자들을 교화한 곳으로 전해진다. 그 증거가 되는 유적이 정거사 뒷편 대소산 석벽에 새겨진 ‘혜사마애석각’이다. 기록엔 ‘대소산에 거주해 혜사가 개석(開石)한다. 갑술(甲戌) 3월 25일’이라고 적혀 있다.
혜사 스님은 북제의 혜문(慧文)으로부터 일심삼관의 묘법을 받고, 스스로 법화삼매를 증득했다. 그 후 여러 곳을 순례하며 교화에 힘쓰다 554년 대소산에 들어왔다. 석벽에 새겨진 갑술년이 554년이니, 그 해에 혜사는 제자들과 대소산에 들어와 글귀를 새긴 셈이다. "혜사가 이곳에 와서 손가락으로 석벽에 글을 쓰니 손끝에서 빛이 나와 글씨가 새겨졌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정거사는 천태종의 종조인 천태 지자(智者)대사(538~597)가 스승 혜사대사로부터 법화삼매를 깨달은 천태종 도량이기도 하다. 따라서 천태종 신도들에겐 ‘한번 쯤 둘러봐야 할’ 성지로 꼽힌다.
천태대사가 혜사를 찾은 것은 23세 때(560년)다. 혜사는 그의 비범함을 보고 흔쾌히 제자로 맞아들였다. 천태 스님은 ‘법화경’을 독송하다 “여러 부처님은 다같이 찬탄한다. 이 것이 참된 정진이며, 이 것을 참된 법을 가지고 공양한다고 이른다”는 대목에 이르러 마침내 법화삼매를 증득하고 초선다라니를 얻어 스승의 인가를 받았다. 곧 그 유명한 ‘대소산 개오’다. 그 뒤 천태대사는 7년간 대소산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근래들어 정거사는 뒤늦게나마 주목받고 있다. 그 까닭은 천태산 국청사는 천태대사 이후 ‘천태종의 본산’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정거사야말로 천태대사가 혜사 스님으로부터 처음 법화삼매를 깨닫고, 일심삼관의 천태묘관과 법화삼대부를 펴게 한 계기를 마련한 천태종의 시원지이기 때문이다. 중국 측 책자에도 대소산 정거사는 ‘천태종의 발상지(發祥地)’라고 기록돼 있다.
정거사에 암자를 짓고 교화를 폈던 혜사는 이후 40명의 제자와 함께 남악으로 가 10년을 더 교화하다, 입적했다. 혜사가 남악으로 들어와서 교화한 인물 중에는 백제의 현광(玄光)도 있다. 현광 스님은 남악으로 혜사를 찾아 보현도량에서 법을 받고, 573년 법화삼매를 증득했다. 현광이 인가를 청하자 혜사는 “그대의 증득한 바는 진실해 거짓됨이 없구나. 이제 수행을 성취했으니 잘 지녀 아무쪼록 본국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일깨워 이익되게 하라”고 격려했다. 백제 위덕왕대 인물인 현광은 백제 웅주 옹산 출신으로, 그의 전기는 ’송고승전’과 ’불조통기’에 실려 있다.
정거사는 한 때 승려 수가 1000여명이 넘었고, 승방이1000여칸이나 됐다고 한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재난으로 훼손과 중건을 거듭해야 했다. 현재 사찰은 많이 쇠락했이지만 그래도 문화재적으로 가치가 있는 비각과 시문 등 유물이 남아 있어 순례객의 발길을 붙든다. 중국 정부도 정거사 일대를 성급(城級) 문화재 보존지구이자, 여행지구로 지정하고 개발 및 복구를 서두르고 있다.
광산현 정거사 문화연구회의 왕조우첸(王照權) 국장은 "허난 성은 물론, 중국 내 사찰 중에서도 명대의 양식과 문화재 등이 남아있는 사찰이 흔치 않아 정거사를 제대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 중이다"고 전했다.
1400여년 역사의 이 절은 선당, 법당, 방장실 등 청대 고건물 59칸이 전해진다. 중심건물인 대웅보전(대불전)은 청대 건축양식으로, 30개에 달하는 둥근 기둥이 독특하다. 지붕을 덮은 기와는 사찰 내부에서 훤히 보인다. 특히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명대 양식을 그대로 취하고 있다.
정거사 앞으론 너른 호수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정거산도’에는 대웅전 뒤편에 탑이 있었고, 사찰 뒷자락 대소산에는 많은 부속 암자들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정거사만이 남아 있다. 사찰 또한 스님이 머물지 않아 고즈넉하다 못해, 쇠락의 기운마저 감돈다.
정거사의 녹차 또한 천년 사찰처럼 역사가 깊다. 6세기 중반 혜사 대사가 암자를 지은 후, 벽산에 차를 심었다고 전해지니 말이다. 현재 이곳 다원에는 청대에 심은 차나무가 600여 그루나 남아 있다. ‘적벽부’로 유명한 북송의 시인 소동파(蘇東坡ㆍ1037~1101년)도 이곳 암자에서 선사들과 차를 마시며 선담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지역 차는 ‘동파차’로 불린다. 정거사 뒤편 대소산 자락에는 아담한 규모의 ‘소동파 독서당’도 조성돼 있다.
허난성 뤄양=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