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동안 나는 계속 항암치료를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손톱 한 개와 발톱 두 개가 빠졌다. (중략)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경외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만큼 창작욕에 허기가 진 느낌이었고 몸은 고통스러웠으나 열정은 전에 없이 불타올라 두 달 동안 줄곧 하루하루가 고통의 축제였다.
소설가 최인호의 신작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여백)는 우선 ‘작가의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침샘암으로 투병 중인 그의 지난 5년간의 공백과 심경, 자기 투쟁, 선언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최인호는 2005년 ‘유림’을 내면서 역사소설이나 대하소설을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이로써 이행하며 자신의 출발점인 현대소설로 돌아왔다.
돌아온 최인호의 모습은 거침이 없다. 가면과 허위로 발라진 욕망으로 들끓는 세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독설도 서슴지 않는다. 악하고 속된 것들을 일일이 호명해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선과 신성함이 그에 이어지고 있음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이는 자신에 대한 뼈아픈 성찰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주인공의 사흘간의 얘기로 제1부 토요일, 제2부 일요일, 제3부 월요일로 구성돼 있다. 토요일 아침, K는 느닷없는 자명종 소리에 잠이 깬다. 다시 자려 하지만 의식이 명료해지면서 주변의 사물은 물론 자신의 모습, 아내도 낯설어진다. 낯익지만 낯섦이 공존한다. 전날 있었던 일을 거슬러 올라가던 K는 21시30분부터 23시까지 기억의 사각지대임을 깨닫는다. 처제의 결혼식에서는 15년 전에 죽은 장인이 출현하고 분실한 휴대폰에서는 아내의 야한 동영상이 뜨는 등 이상한 일은 계속된다. K는 자신이 자신임을 확인받기 위해 누이를 찾아가지만 누이에게서 난데없는 성욕을 느끼고, 마침내 누이가 오래전 사랑한 남자, 레인저를 찾아나선다. K는 그가 바로 자신의 다른 분신 K2임을 깨닫는다.
월요일 아침, 그는 여느 때처럼 자명종 소리에 깨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거기서 노출증 여인, 여장남자 교수, 업소의 세일러문 등 이틀간 섀도 박스 속에서 만났던 등장인물들을 차례로 만난다. 그리고 그는 지하철 철로에 마법의 봉을 떨어뜨린 세일러문을 구하러 뛰어든다.
지하철 철로에 투신한 사나이는 최인호의 이전 단편 ‘달콤한 인생’에도 등장하는 모티브다. 달라졌다면 ‘달콤한 인생’에선 제3자로서 투신한 사나이를 얘기하고 있다면, 이번엔 바로 주인공 자신이라는 점이다.
K가 구하러 들어간 대상이 ‘생명의 나무를 지켜야 한다’는 ‘달의 요정 세일러문’이라는 점도 들여다볼 만하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세일러문의 속됨과 생명의 나무라는 창세기적 성스러움을 합치시킨 지점에 작가 최인호는 서 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