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에 대한 쇼펜하우어와 에디터와의 솔직한 대담
<글 육성연 기자, 사진 조항일포토그래퍼(Zo Space 스튜디오), 일러스트 김다혜 대학생 일러스트레이터>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많은 이들의 마음을 끌게 한 그만의 매력에 대하여 캠퍼스헤럴드 에디터와 실존철학의 대가 쇼펜하우어가 솔직한 가상대담을 열었다. Editor 정말이지 질투 나네요 이 남자 알랭드 보통! 보통 아닌, 위대한 작가이니 말이에요. 그의 칼날 같이 날카로운 통찰력, 그의 똑 부러지는 박식함, 충격적인 그의 지적 위트, 이 모든 것을 세련되고 간결히 담아내는 그만의 문체, 그리고 훔치고 싶은 그의 주제들∙∙∙. 다른 훌륭한 작가에게도 느끼지 않았던 제 질투를 (그것도 강렬하게) 일으킨 유일한 사람입니다.
(물론 상상만으로) 꼭 한 번 만나 연애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매의 눈과 같은 그의 통찰력으로 저의 생각이 전부 읽힐까 봐 연애는 피하고 싶네요(웃음). 그만큼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죠.
Schopenhauer(쇼펜하우어) 아주 오랜만에 지적 희열과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책을 읽었습니다. 저 역시 이 저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할 말이 많습니다.
Editor 그의 책을 읽다 보면 히포크라테스가 주장한 사람의 기질 유형 중, 그가 완벽주의 ‘우울질 기질’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어요.
Schopenhauer 보통 사람이 한 가지 생각을 할 때, 저 같은 우울질은 5-20가지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죠. 알랭 드 보통처럼 어떤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그 원인을 분석하면서 말이에요. 보통 천재나 예술가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기질입니다.
Editor 우울질은 자기반성이 심하고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습관이 있어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거나,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우울한 사람으로 극단화되기 쉬운데, 알랭 드 보통은 전자에 속하는 것 같아요. 성공한 우울질인 알랭 드 보통, 그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위트에 대하여
Editor 알랭드보통의 문장은 굉장히 세련되고 통통 튑니다. 누구보다도 세심하고 정교한 문체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세련된 위트실력입니다. 지식과 통찰력으로 무장된 위트, 아무나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죠.
Schopenhauer 네. 맞습니다. 보통 나처럼 박식하고도 명석한 사람들은 위트가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심각한 학문적 업적들과 마주하다 보면 저절로 진지한 사람이 되기 쉬우니까요. 제게도 이러한 위트가 있었다면,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의할 때 최고 인기였던 변증법 강의 헤겔 교수에게 학생들을 다 빼앗기지도 않았을 텐데요. 역시 사람에게 타고난 위트는 위대한 선물같군요.
Editor 다소 무거운 그의 주제들이 책장을 넘기기 쉽게 변한 건, 아무래도 그의 세련된 위트때문이 아닐까요?
불안에 대하여
<불안> 中
Schopenhauer 고백하건대, 제 인생의 대부분 결정은 바로 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늦게 학업을 시작한 것이 불안해서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교수직을 떠나 연구와 집필에만 매진했던 것도 경쟁자 헤겔교수에게 다시 완패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저 옛날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나 쇼펜하우어, 그리고 화가 뭉크를 지나 현재의 많은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불안’이란 주제는 철학자와 예술가들 고민의 근원이죠.
Editor 그러나 알랭드 보통의 ‘불안’이 가장 맘에 드는 것은, 그 불안의 이유를 아주 명쾌하게 제시한다는 것이죠. 그것도 심플하게. 이 책은 사회심리학관련의 아주 재미난 논문 한 편을 읽은 기분을 들게 했어요. 그가 385P에 걸쳐 열심히 설명한 내용은, 현대인의 모든 심리적 질병의 원인인 불안이 ‘불확실한 사회에서 홀로 책임져야 하는 자유’에서 비롯된다고 일축할 수 있겠네요.
그는 “다른 사람이나 사회적 기대치 혹은 그것에 영향을 받는 자신의 기대감에 못 미치는 자신을 발견할 때 불안이 일어난다”라고 합니다. 중세인들이 현대인보다 불안의 정도가 낮았던 것은, 노예신분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신세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교해 능력주의 체제인 현대사회에서 가난은 ‘어리석고 노력이 부족한 자’라는 오명과 무거운 책임이 따르게 되죠. 또한, 그러한 불안을 느끼는 원인은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원하려는 본능 때문이라고 합니다.
Schopenhauer 이 때문에 알랭드 보통은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이 말 다들 아시죠? 저의 유명한 명언인 “이성은 의지의 하녀다”라는 말을 인용했다는 것(웃음).
불안이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현재 자신에게 불안과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Editor 당최 그 원인을 알지 못하는 불안으로 맘 고생하시는 분들. 아마 이 책 읽으시면 불안을 사회적 탓으로 조금은 덜어낼 수 있어 가벼워지실 듯해요. 다시 말해 ‘현대적 불안’은 개인의 인식 탓도 있지만, 능력주의 사회가 개인이 그러한 감정을 배워서 느끼게 만드는 ‘사회적 감정’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 불안을 어떻게 해소할지 그가 제시한 해결법은 직접 책을 사서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에 대하여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中,
Editor 연애마저 꽤 지적으로 할 것 같은 그다운 표현입니다. 하지만, 인문, 철학 등의 학문적 접근으로 펼쳐지는 이 지적인 연애는 고품격 스토리가 아니라 평범한 우리들의 연애스토리라는 것입니다. 다만 거기에 우리가 지나쳤던 세세한 의미를 철저한 원인으로 분석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죠. (조금 다듬어지지 않음과 격한 청춘의 감정이 몇 군데 오버된 것만 뺀다면) 그가 스물다섯에 처음 쓴 처녀작이라니, 그는 분명 천재입니다(웃음).
Schopenhauer 사랑은 없습니다. 운명적 사랑? 그것 역시 위대한 괴테선생님의 말씀처럼 ‘대상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운명의 여부가 결정된다’고 보면 됩니다. 관심 없던 이성에게 똑같이 나타났던 우연한 마주침도 관심 있던 이성에게서는 필연적 운명으로 바뀌니까요.
Editor 네. 소설 속 주인공은 이런 말을 하죠.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낭만적 편집증 환자가 되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방과의 모든 평범한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다’라는 건 왜 그렇죠?
Schopenhauer 자신의 고결한 사랑을 이렇게 믿고 싶지는 않겠지만, 사랑은 어차피 ‘인류의 종족유지’라는 대전제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임신이 가능한 20대 여성을 좋아하는 것도, 눈 작은 남자가 눈이 큰 여자에게 끌리는 것도 모두 자식들에게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주기 원하는 종족유지 본능에 의한 것이니까요.
Editor 어머니와의 불화에서 탄생한 여성 혐오 인식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선생님을 사랑한 여자를 단 한 명이라도 만나봤다면, 아마 선생님의 이론은 꽤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돼요. 진정한 사랑을 나눠봤다면, 자신의 사랑을 단순한 종족유지의 본능이라고 정의 내리기 싫어질 테니까요.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사랑의 의미에 많은 것을 의지합니다. 사랑이 주는 참으로 복잡한 교훈으로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요. 알랭 드 보통 역시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사랑이 주는 모든 의미를 인정할 때 인간은 그 사랑이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하는 가장 난해한 과제가 남게 되죠. 알랭드 보통이 말한 성숙한 사랑처럼 ‘절제로 가득하고, 이상화에 저항하며, 성적차원을 갖춘 우정의 한 형태로서 유쾌하고, 평화로운 사랑’으로 말입니다.
Schopenhauer 하지만, 사랑을 하고 있어도 늘 행복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바로 이 점이 제 인생론의 핵심이기도 한데, 원하는 것을 가져도 인간은 생애 의지(욕망)으로 인해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행복은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님의 말처럼, 인간은 고통의 원인인 욕망을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Editor 사랑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은 이 소설 속 클로이와의 스토리를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이 소설에서 맘에 들었던 결론과 동일합니다. 주인공은 사랑과 이별의 모든 것을 겪은 후 가장 현명한 답안으로, 선생님의 견해처럼 사랑의 욕망을 절제하며 살겠다고 다짐해요. 그러나 디너파티에서 만난 파란 눈의 레이철에게 주인공은 한 순간에 또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사랑은 비합리적인 만큼이나 불가피한 것이니까요.
위로의 철학에 대하여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中
Schopenhauer 저를 두고 비관적 염세론자가 떠드는 부정적 인생론이라는 편견으로 아예 제 책을 읽지 않으려는 분들이 있던데, 왜 사람들이 ‘쇼펜하우어를 읽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는지를 여기서 전하고 싶습니다.
저의 철학을 영향받아 니체는 고통을 재해석 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평범했던 사람이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성숙한 삶이 완성된다.’는 니체의 산 철학을 통해 고통에 익숙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저와 니체가 극진히 존경하던 괴테선생님의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아닌,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제목을 통해서 말입니다.
Editor 베르테르의 고통은 자살로 이어졌지만, 사랑의 고통이 베르테르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얘기군요. 몇몇 분들에게 쓸모 없이 골치 아픈 생각 덩어리들이라 치부되던 철학을, 바로 일상생활 젊은이들의 눈물 앞에 ‘위로’라는 이름으로 변신시키면서 말이에요.
Schopenhauer 철학을 삶에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않을지라도 인생은 어차피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러니 미래에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감을 버리고, 지금 자신에 충실하여 순간순간 반짝반짝 빛나게 살아보자는 것이죠.
날카로움과 유쾌함 극단의 사이에서
Schopenhauer 알랭 드 보통은 인생을 딱 세 번 정도 살아본 사람 같습니다. 사람에 대한 세밀한 심리묘사, 사람이 가지는 생각에 대한 이해, 세상에 대한 관찰력 등을 보면 말입니다.
Editor 그는 평생 혼자만의 세계에서 외로울 것 같아요. 그 누구도 그만의 날카롭고 예민한 생각과 마음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가 욕심을 버려 자신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옆에서 마음의 안정을 채워줄 여자에게 만족한다면 달라지겠지만.
다양한 분야에 걸쳐 내용을 기술하는 그를 따라가다 보면 ‘지적유희’라는 것도 교수님만이 누리는 고상한 취미가 아닌,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을 독자가 느끼게 되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날카로운 분석력과 가벼운 유쾌함 극단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균형을 잡아내는 그만의 매력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Schopenhauer 맞습니다. 또한, 철학자로서 한마디 한다면, 굳이 그가 철학 전공자로서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지 않았어도, 충분히 깊은 생각으로 일상을 철학적으로 재해석하는데 그만의 매력이 생긴 것 같습니다.
Editor 그는 또 시대를 잘 타고난 사람인 것 같아요. 하나로 연결된 모든 학문을 적절히 서로 연결하여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을 이 시대가 필요로 하니까요. 그의 소설에서는 인문, 종교, 예술학, 철학 등이 한 가지의 카테고리안에 서로 연결되어 나옵니다. 글들은 그의 위대함을 자랑시켜줄 뿐 아니라 삭막하기 그지없는 현대사회의 우리에게 살포시 메시지까지 남기는 힘이 있죠. 독자들은 다양한 주제에 관한 그의 글을 이해하면서 기분 좋게 설득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