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발가락보다 긴 갸름한 둘째발가락, 화면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큼지막한 발엔 힘줄이 곧게 뻗어있다. 양 옆과 아래 위엔 알 수 없는 암호같은 숫자들이 질서정연하게 화폭을 채우고 있다. 장난스러워보이는 작은 몸체인형의 손에도 여러개의 말풍선 속에 숫자가 가득하다. 차곡차곡 쌓인 숫자들을 빌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알수없는 숫자들은 익명의 사람들?
배우 하정우의 그림 ‘Foot’ (캔버스에 아크릴릭/162x130cm/2010)은 얼핏 가벼워보이기도 하고 마치 이상의 시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색과 미술적 개념에 대한 이해만큼은 탄탄해 보인다.
영화‘용서받지 못한 자’‘추격자’‘국가대표’황해’등에서 선굵고 개성있는 역할을 해온 배우 하정우가 그림 에세이 ‘하정우, 느낌있다’(문학동네)를 펴냈다.
그는 벌써 제대로된 전시회 경력이 세차례나 있다.
그래도 그는 배우 겸 화가로 불리는게 여전히 뻘쭘하다. 그래서 그림그리는 일을 그는 ’화가놀이’라고 말한다.
그림공부를 한 적이 없는 그는 화집을 스승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첫 화집은 배우 고현정이 선물한 에드워드 호퍼의 화집. 하정우는 “현정 누나는 미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고 관심있는 작가의 그림을 직접 모을 정도로 미술을 좋아했다”며 "우리는 화가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고 말했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상식이 전부였던 그에게 현정누나와의 대화는 즐거운 미술수업 같았다는 것이다.
그는 엘리자베스 페이턴, 루이스 브루주아도 고현정을 통해 알게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누나에게 언젠가 나만의 화집을 선물해줄 날이 온다면 좋겠다”고 고백했다.
하정우의 ‘맨’이란 그림은 나홍진 감독의 올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대된 ’황해’에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책에는 오늘날의 하정우를 있게 한 ’용서받지 못한 자’ 윤종빈 감독과의 각별한 인연, 힘든 시기를 거치며 더욱 애틋해진 아버지 배우 김용건, 피카소의 청색시대에 빗대 스스로 ’회색시대’라 이르는 암울했던 시절 이야기 등이 그의 작품과 어울려 독특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