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숙
어떤 그림에 자화상이란 이름을 붙이는 게 새삼스럽다.모든 작가의 작품은 다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구태여 거울을 들고 자기 모습을 그대로 그려나가지 않아도 그건 자화상이다.
아니, 전시장 한가운데 모래를 쌓아놓고 철사줄 하나를 박아 놓아도 그것은 그 사람의 모습이다.
나의 그림들은 이 자화상의 요소가 짙다. “나”가 진하게 들어있는 일차원적인 나의 그림들이 가끔은 어리석고 답답하게 느껴져서 객관성을 갖느라고 새로운 몸가짐을 해봐도, 그 밑에는 조금 조리법을 달리한, 휘장을 두른 “나”가 그대로 있다.
내 눈에 보여지는 세상, 내 마음에 와닿는 정경들, 나를 들뜨게 하는 것들, 내가 무서워하는 그림자들, 내가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이 모두 그림이 된다. “나”라는 작은 우주 속에서 떠다니는 수많은 소리, 기억, 이야기, 그리움, 꿈 등의 이미지들이 화폭에 내려앉아 자기 자리들을 잡고 이어져서 그림이 만들어 진다. 내가 살아내는 삶의 일기책이다.
휘영청 달이 뜬 물가에 나와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여인을 표현한 김원숙의 그림. 영락 없는 자화상으로 작가의 머리 위에 올라 앉은 커다란 새 한마리도 작가와 한 몸이 되어 함께 그림을 그리는 듯하다. |
이것도 나이 때문인지 여기 저기서 한 말씀을 부탁해온다. 아무리 성의껏 준비를 해봐도 입만 열면 은근히 내 자랑이 시작된다. 주워 담을 수 도 없는 부끄러운 말들이 이어지고, 그래서 만날 후회만 하게 되니까 이젠 피해야 할 일인게 틀림없다.
그런데 그림은 글이나 말 보다는 숨을 곳이 많다. 시각적인 여러 요소들과 구성 공간 사이에 나를 조금은 숨길 수 있다. 그래서 보는 사람 누구나가 그들의 자화상을 볼 수 있는 공감의 이미지로 그려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김원숙의 ’Angel Trumpet’. 화분에 핀 꽃이 천상의 연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
하지만 그림이 요술인 것이, 숨는다, 숨긴다 해도 어디서 어떻게 숨었는지, 다 보인다는 것이다. 놀랄만큼 신기한 착상이든, 억지로 쥐어짜낸 거짓말이든, 나도 몰랐던 것까지 솔직히 그대로 다 보여지는 게 그림이다. 나는 이 그림이라는 재미난 놀이에 아직도 취해 있다.
자화상이란 글에 더 맞는 그림을 고르려다 보니 모두가 “나” 그림이다. 아! 나는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 <글, 그림= 김원숙(화가) >
▶화가 김원숙(58)은 부산에서 태어나 홍익대와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원을 졸업했다. 국내외에서 50여회 넘게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다. 그의 그림은 형상성을 띄고 있으나 일반적인 사실주의 회화와는 다르다. 대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밀한 정서를 현대적 조형언어로 부드럽고도 세련되게 그려낸다.
비가시적 실재를 찾아내고, 표면화된 외형 속에서 인간과 삶의 본질을 낚아채 듯 표현하는 것. 그의 그림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어내는 것은 작품의 진정성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나그네의 여정에 비유하며 유유히 흐르는 생의 순간들을 표현해낸 주제의 보편성도 공감을 얻어낸다. 사랑과 증오, 언약과 배신, 화해와 갈등 등 생의 순간들을 김원숙은 시처럼 써내려간다.
이영란 선임기자/ 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