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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가 권여현 "표정은 내 것이다!"
프로이트가 ‘Uncanny’라는 단어를 만들었을 때를 생각해본다. 그가 우연히 거울을 보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어떤 초라한 중늙은이가 서있었다고 한다. ‘익숙하지만 낯선’이란 심리학적 용어는 그렇게 탄생했다.
어느덧 얼굴에 책임질 나이가 되니 나도 다시금 거울을 보며 프로이트를 떠올린다. 10대와 20대 모습이 아직도 전체윤곽을 구성하고, 그 위에 주름이 좀 늘었을 거라는 희망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내가 아닌 내’가 거울 속에 서있다. 기억의 영사기는 과거의 얼굴들을 나이별로, 사건별로 파편처럼 보여준다.

개별적으로 보이는 단편그림이나 사진을 이미지 Image라 부른다면, 일관성 있는 심상(心象)의 상징은 이마고 Imago 다. 나는 이마고Imago로서의 나의 얼굴을 많이 표현해 왔다.

나는 주로 개인과 만인의 관계를 규정한 그림을 통하여 한사람의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고민해 왔다. 


초창기의 나의 그림은 개인의 내면표현이었다면, 최근까지 작업은 사회에 반영된 모습으로서의 얼굴과 표정에 관한 내용들이다. 처음에는 이 세상에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던져진 인간을 표현하였고, 곧 이어 이 세계에 던져짐을 인정하는 세계내 존재로 그려진 나의 자화상은 지금은 거울상을 통과하여 사회의 구조 속에 구속된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림을 보는 나의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욕망의 리비도는 나에게 문명에서 미개로 되돌아가고, 다시 야만의 상태에 던져지기 원한다.

나의 자화상은 내가본 나의 모습이기 보다는 타인이 본 내 모습, 즉 타인의 타인이다.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나는 나르키소스(Narcissos)가 아니다. 그래서 내 얼굴은 타인의 것이다. 그러나 표정은 내 것이다. 나는 소통의 미학이 싫다. 정보 전달로서의 미술은 더 이상 문학이나 매스미디어의 정교성을 극복할 수가 없다. 미술가가 만든 작업은 비평과 저널, 인터넷 정보의 다양한 분석도구에 해체당하는 순간 작가는 더 이상 아우라(The Aura)를 창출하는 직업군이 아니다.


왜 이 사회는 좀 신비하고, 느슨하고, 생략된 것들에 관대하지 못할까. 숨이 막히는 세련된 사회를 탈주하여 나는 나에게 계몽이전으로 돌아가길 권한다. 그리고 야만성의 회복을 위하여 사이버세계에서 구현되는 매트릭스(Matrix)의 가상현실(시뮬라시옹 Simulation)을 그림의 장에서 구현하기를 권한다.
비록 나의 얼굴은 타인의 것으로 양도하지만, 나의 표정만은 이성의 세계를 마음껏 농락하고 감각의 세계로 타인을 이끌 수 있다. 나의 소통방법은 역설적으로 본질을 흩트리고 소통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나의 작업은 표정이라는 기호를 낯설게 만들거나 전복시킴으로서 나의 의사를 모호하게 만든다. 표정전복은 사람들의 쉽게 믿는 익숙한 이미지일수록, 증명사진처럼 사실을 강하게 담보해 주는 기호일수록 더 가치전복에 적합하다. 

사실은 나는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얼굴을 보고 싶다. 나의 리얼리티는 매일 만나는 학생들과 생각놀이로서의 미술활동이다. 내가 나의 얼굴을 볼 수없는 것은 시지프스(Sisyphus)가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야하는 운명과 쥬이상스 jouissance 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같다.

나의 얼굴을 내가 볼 수 있을 때 까지 내 얼굴을 봐 주는 사람들과 매끄러운 길을 동행하고 싶다. < 글, 그림= 권여현(작가) >

사진설명= 복잡한 현대문명에서 미개로 되돌아가 ‘야만의 상태’ 던져지길 꿈꾸는 작가 권여현이 그린 자화상. 누드크로키 수업시간의 모델과 또다른 여성모델이 이중으로 등장하고 화가인 자신은 그 모델의 몸에 검은 물감을 칠하고 있다.
아래는 권여현의 신작 ‘헬로 들뢰즈 씨’. 낯익은 이미지를 낯설고 모호하게 만들었다. 서울 수송동 OCI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융합’전(~5월18일까지)에 출품된 작품이다.

▶작가 권여현은 서울대 회화과 재학(1984년) 중 창작미협 공모전 대상, 86년과 90년 동아미술상과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91년 석남미술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1988년 첫 개인전 이래 매년 개인전을 여는 등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그의 주제는 ‘인간’이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성찰하며 그림을 그린다. 한 개체가 세상에 내던져졌다는 입장에서 시작되는 권여현의 그림은 자신을 주인공 삼아 나르시스가 자신을 보듯 여러 심리적 초상으로 다각도로 표현된다. 최근에는 외부환경과 공간을 화면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조형실험을 더욱 입체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때로 권여현에게 조형은 주제를 압도하며 화면을 매우 풍부하게 한다. 퍼포먼스, 사진, 콜라주, 설치 등의 분야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현재 국민대 미술학부 교수.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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