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청보리밭축제 내달 8일까지
올해로 8회째 ‘고창보리’ 이름값봄이면 100만평 녹색융단 장관
관광객 시선고정 감탄사 연발
퓨전강정 만들기·스카프 염색하기
7가지 체험마당 쏠쏠한 재미
경유지서 머물며 쉬는 축제로
지속발전 위한 과제 남아
“이 정도로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보리밭이 마치 유럽의 밀밭길처럼 이국적이네요.” “이렇게 초록을 볼 수 있는 곳이 없잖아요. 푸름이 확 펼쳐지니까 참 시원해요.”
지난주 말 축제 시작과 함께 한 차례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던 ‘제8회 고창 청보리밭축제’(4월 23일~5월 8일) 현장은 주중 호젓하게 즐기려는 연인과 부부로 한층 여유롭고 싱그러운 풍경을 자아낸다.
시끌벅적한 축제는 그것대로 신나지만 겨우내 지친 푸르름의 갈증을 맘껏 풀어내고 싶은 이들에겐 보리밭 사잇길을 부대끼지 않고 마냥 걸어내기엔 주중 축제가 제격이다.
어른 정강이까지 자란 보리는 바람이 부는대로 몸을 누이며 푸른 내음을 발산한다. 이미 잎이 패기 시작한 것에선 고소한 내가 슬쩍 코 끝을 스치는 듯하다.
보리밭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고창의 보리는 기후와 토양이 맞아떨어져 오래전부터 이름값을 해왔다. 눈이 많아 겨울 초입에 심은 보리가 눈을 이불 삼아 따뜻하게 씨앗을 보존하고, 보드라운 붉은 황토와 사방이 트인 지형적 특성, 서해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보리의 생장에 더없이 좋은 조건으로 작용했다. 이삭에 병이 도는 붉은 곰팡이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강한 곳이다.
특히 이곳 고창 공음면 학원관광농원 청보리밭은 그냥 펼쳐진 심심한 보리밭과는 좀 다르다. 구릉을 살려 입체감을 주는 시원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모습은 막막함 대신 흥겨움과 아늑함마저 준다. 안개 낀 희끄무레한 아침 나절의 보리밭 풍경, 해질녘 노을에 비낀 보리밭 풍경은 또 다른 그림이다. 100만평 가까이 펼쳐진 푸른 들을 배경으로 편안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탓에 자연의 카페랄까, 사람들은 그저 보리밭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자꾸 걷는다.
’보리피리 불며/봄 언덕/고향 그리워/필릴리//보리피리 불며/꽃 청산/어린 때 그리워/필릴리’.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나 입가에 절로 맴도는 국민 가곡‘ 보리밭 사잇길로’는 그 애절함 때문에 끝까지 읊조리기 쉽지 않다. 척박했던 시절의 보리밭과는 달리 고창의 청보리밭은 풍요롭다. 푸르른 색과 내음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
8년째 축제를 이끌고 있는 진영호(63) 축제위원장은 “축제의 주인은 다름아닌 보리”라며 “보리 자체가 아름다운 게 이 축제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한다.
보리 구경을 온 관광객도 축제장에서 흔히 찾게 되는 공연이나 볼거리, 이벤트 등의 즐거움은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보리가 참 예쁘고 좋다”며 먼 시선을 떼지 못하고 연방 감탄사다. 보리 사이를 걷는 것도 좋지만 마차와 자전거로 한 바퀴 둘러보는 건 또 다른 맛이다.
보리축제라고 보리 구경이 다는 아니다. 쏠쏠한 체험마당 7가지도 해보지 않으면 섭섭하다. 보리와 보리순을 넣어 만든 보리개떡 만들기, 달궈진 소금으로 볶아낸 고소한 오곡을 초콜릿으로 버무린 퓨전 강정 만들기, 나무를 이용해 목걸이 만들기, 천연염료로 스카프ㆍ손수건 염색하기 등 추억거리 삼을 만한 체험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인기다.
이 마을 70대 노인에겐 보리밭의 추억이랄 게 하나씩 있게 마련. 옆 동네인 고창군 해리면 태생인 김공진(75) 씨는 “껀정보리가 익으면 거기처럼 연애하기 좋은 데가 없제”라며 그 옛날 보릿고개 얘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보리는 보기에도 좋지만 냄새가 그만이다. 그 미묘한 냄새를 도시 사람들은 잘 맡아내지 못한다. 각종 자극적인 향에 둔감해진 후각은 바람이 실어다주는 냄새 사이에서 어느 게 풀 냄새인지, 꽃 향기인지 가려내지 못하지만 농부는 단박에 안다.
김 씨는 보리 냄새를 한 마디로 “푸르름”이라고 묘사한다.
“바람이 한 자락 불면 푸르른 싱싱한 냄새가 나는데 그게 그렇게 좋아. 참 아까워. 서울양반에게 맡게 해주고 싶제. 목마를 때 시원한 물 한 대접 먹는 맛이랄까.”
그의 말에 따르면 그 푸르름은 코 대고 킁킁거린다고 나는 냄새가 아니다. 10여㎞ 떨어진 서해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젖은 바람이 보리 이파리에 닿아야만 이는 냄새다.
고창 청보리축제엔 보름간 약 50만명이 다녀간다. 올해로 8회째로 한 번 다녀갔던 이가 또 찾는 재방문율이 높다. 진 위원장과 마을사람들이 경관농업 차원에서 시작한 이 축제는 자생적인 축제인 만큼 생활과 밀접히 연결돼 있어 저예산으로도 운영이 가능하다. 축제를 열기 위한 토지보상 때문에 지자체 예산의 절반을 까먹는 여타 축제와 달리 농사짓는 걸 구경시켜주는 만큼 따로 큰 돈 들이지 않고도 1억원 미만으로 운영이 가능하다. 축제 수입은 식당과 체험지도, 특산물 판매만으로 8억원 수입이 생기니 농가로선 보리농사보다 낫다.
그러나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정부의 보리 수매가 올해로 끝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고민은 경유지로서의 축제 성격을 머물며 쉬는 축제로 바꾸는 것. 입장료나 주차장비가 없어 가볍게 들르는 이가 많은데 축제마을로선 아쉽다. 관광업체도 별도의 비용 추가 없이 관광코스를 하나 더 추가하는 식으로 상품의 질을 높일 수 있어 선호하고 있는데 이를 바꿔 나가는 게 과제다.
올해 보리밭엔 유채꽃이 컬러를 더했다. 꽃이 한창 예쁠 때여서 보리밭과 잘 어울린다. 보리를 거두고 나면 가을 보리밭은 하얀 메밀꽃밭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고창은 그렇게 1년에 두 번 초록과 하양으로 물든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