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조카들이 집에서 뛰어 노는걸 보면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마치 만화 속 주인공이나 된 듯 행세하며 왁자지껄 잠시도 조용할 틈이 없다.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나도 어릴 적엔 만화를 보면서 꿈을 꾸곤 했던 것 같다. 망토를 두르고 하늘을 날아다니고도 싶었고, 레이저총을 쏘며 악당들을 물리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절대 신공의 권법소년이 돼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도 싶었다. 시간여행을 하며 신기한 경험을 해보고도 싶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내 그림 속 주인공은 하늘을 날기도 하고,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하기도 한다. 용을 타고 노는가 하면 인어와 만나서 놀기도 한다.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서 부럽기만 하다. 그런데 언뜻 보니 명찰을 달고 있다. 누군가 했더니 내 이름의 이니셜인 TK가 써진 명찰을 달고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림 속에서 나의 분신인 주인공 TK를 만들어서 내가 어릴 적 꾸던 꿈을 대신 이뤄주고 있다. 그러다보니 내가 자화상을 그린다고는 특별히 생각지 않았는데 어느덧 자화상이 되었다. 나의 지금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내 마음에 간직한 꿈을 그리는 자화상을 말이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어릴 적부터 만화 보기와 낙서하기를 좋아하다 보니 생각도, 작업도 모두 만화와 낙서를 닮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내가 느낀 만큼, 내가 아는 만큼, 솔직하게 그려야 진짜 나만의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작업하다 보니 그리된 듯하다.
대다수의 그림 속에서 나는 마치 혼자서는 외로운 듯이 여러 인물들, 동물들, 다른 생명체들을 친구 삼아 즐거워하고 있다. 내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뤄주는 미지의 공간에서 함께 즐기고 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지금은 나의 부인이 된 여자친구와, 항상 놀아달라고 보채는 작은 치와와 두 마리다. 바쁘게 작업하는 내 곁을 줄곧 지켜주는 이들이 내심 나의 꿈에 동참해주길 바라고, 알 수 없는 어떤 다른 세상으로의 신나는 모험을 같이 하고 싶기 때문이다.
영국의 작가 새뮤얼 버틀러는 ‘유토피아’를 ‘에레혼’(erehwon)이라 표현했다. 거꾸로 쓰면 ‘노웨어’(nowhere)인데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의 말처럼 유토피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겠지만 나는 그림 속에서 항상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 마음껏 살아가고 있다. 나는 참으로 행복한 직업을 가졌다.
<글, 그림=임태규(미술가) >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와 중앙대 대학원을 졸업한 화가 임태규(35)는 데뷔 초부터 독특하고도 짜임새 있는 작업으로 금호미술관의 금호영아티스트, 송은미술상, 석남미술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아왔다.
임태규는 비행선과 우주선, 심지어 용(龍)의 등에 올라타 하늘을 유영하거나 바닷속을 잠수하는 그림을 즐겨 선보인다. 또 우산 들고 빗속 걷기, 댄스, 사랑 나누기 등 일상의 모습을 두루 표현한다. 장지에 먹을 듬뿍 묻힌 후 순지를 덮고, 빠른 필치로 인물과 사물을 그려내는 임태규의 그림 속엔 늘 작가의 분신인 1인칭 인물과 사랑하는 아내, 강아지가 즐겁게 등장해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유쾌한 모험의 세계’를 우리 앞에 신명나게 펼쳐 보인다.
<사진은 작은 비행선을 타고 푸른 창공을 즐겁게 나는 모습을 조각한 임태규의 자화상 ‘fly away home’. 유쾌ㆍ통쾌한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가슴에 새겨진 ‘TK’는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이니셜. 사진제공=임태규>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