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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초의·추사…조선茶의 새경지 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의의 ‘동다송’에 전하는 ‘동다기(東茶記)’는 다산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었다. 실물이 전하지 않고 한 줄 인용만으로 전설처럼 전해져온 것을 지난 2006년 정민 교수가 찾아내면서 다산의 것이 아니라 진도로 귀양온 이덕리가 지은 것이라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차계는 흥분했다.

이후 놀랄 만한 사실들이 잇따라 나왔다. 흔히 다산이 초의나 아암 혜장에게 차를 배웠다고 알려졌지만 그 반대다. 다산은 귀양오기 전에도 차에 대한 식견이 높았으며 내려와 병 때문에 차를 찾았다. 1805년 우연히 만덕산 백련사로 놀러갔다가 주변에 야생차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아암 혜장 등 백련사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동안 서가 한구석에 꼭꼭 모셔져 빛을 보지 못한 차 자료들이 정 교수의 노력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 ‘부풍향차보’와 각종 차 관련 저작 및 편지 등 수많은 사료가 잇따라 발굴되면서 한국의 차문화와 역사는 달라졌다.

무엇보다 수십년 동안 답습해온 오류들이 바로 잡혔고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났다.

정 교수는 다산이 초의에게 제다법을 전해주는 시기로 1809년 사제의 연을 맺은 이후 2, 3년으로 본다. 이때가 다산의 나이 48세, 초의의 나이 24세였다.

초의가 초당을 드나들 당시 다산은 이미 차를 만들고 있었고 그 제법이 초의에게 이어졌다. 초의차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830년의 일. 스승 완호의 사리탑 기문을 받기 위해 상경했는데 그때 예물로 준비한 것이 보림백모 떡차였다. 우연히 벗을 통해 이 차의 맛을 보게 된 박영보가 ‘남차병서’ 시를 지어 사귐을 청하고 초의가 이에 화답함으로써 초의차가 처음 알려졌다. 우리 차의 역사와 효능, 차 마시는 절차와 방법을 정리한 초의의 동다송을 통해 우리 차는 이론에서도 깊이를 갖게 됐다.

초의차가 유명세를 탄 데는 추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추사의 차 사랑은 신들린 지경으로 보인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수십통의 편지는 거의 차 이야기다. 추사는 초의 차를 얻기 위해 글씨를 써주고 그림을 그려주는 등 애를 태웠다.

초의의 자 중부(中孚)는 주역의 괘이름으로 다산이 지어준 것이다. 중부는 차와 관련된 중층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초의뿐 아니라 호의나 향훈, 색성 같은 승려들도 차를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으며 차 애호가 명단에는 박영보, 신위, 정조의 외동사위였던 홍현주가 가세했다.

정 교수가 학문적 고증 없이 입으로만 전해 내려온 탓에 수십년간 답습 누적된 오류들을 바로 잡은 것은 의미롭다.

40여구에 불과한 한 편의 시인 ‘동다송’을 수십 토막으로 잘라 17송이니 31송이니 하는 잘못된 독법 등 바로 잡은 것도 공이 크다다.

특히 강우방 교수의 문제제기로 진위논란에 빠진 추사의 ‘茗禪(명선)’이란 글씨를 꼼꼼한 고증과 논리로 추사가 초의의 차를 받고 흥취를 못이겨 쓴 신필임을 밝힌 게 흥미롭다.

멸절 위기에 놓였던 조선의 차문화를 다시 일으켜 세운 다산과 차의 시대를 활짝 연 초의, 차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보급시킨 추사에 대한 정 교수의 치밀한 추적과 연구를 통해 복원된 차 문화가 비로소 항간의 이야기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로 굳게 자리잡힌 느낌이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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