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소중한 물건이 있기 마련이다. 차마 버리지 못한 사연이 있거나 추억이 담긴 오래된 물건들 말이다.『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2011,아우라)는 그런 사연을 담은 책이다. 오랜된 물건만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만난다고 할까.
저자는 독일 유학 시절 주말마다 찾은 벼룩시장에서 수집한 몽당연필, 필통, 은빛 도시락과 주전자, 다리미, 무쇠촛대 , 고서, LP 원판들 등 29가지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그 물건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것들 하나 하나에 담긴 애정을 말이다. 고국을 떠나 낯선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외로웠겠는가. 그런 그에게 사물들은 친구이며 가족이었고 그가 꿈꾸는 예술이었을 것이다.
독일의 벼룩시장은 우리네 시골 장터와 같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온 삶을 보여주고 흥정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정겨웠다. 꼭 벼룩시장이나 앤티크 시장이란 이름으로 불리지 않더라고 시장엔 누구나 추억이 있기 마련이다. 오래된 사물에서 독일인의 근면성과 절약정신을 느낄 수 있다.
사진과 글로 만나는 사물에 담긴 이야기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처럼 아늑했고 아름다웠다. 내게는 생경한 물건들이 많았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즐거운 일이다.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유겐트슈틸 램프를 시작으로 앙증맞은 몽당연필, 근사한 맥주잔, 사진 속 글자판에 손을 대면 ‘탁 탁 탁’ 아름다운 글씨가 피어날 듯한 매혹적인 독일제 타자기에 반하고 말았다. 담백한 글로 사물은 더 빛난다. 습도계에 대한 글은 특히 더 그렇다.
‘할아버지의 습도계는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상상하게 해주는 예술의 오브제로서 다가왔다. 미세한 물기를 머금어 눈금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 사람 몸 안에서도 습도계가 있을 것 같다. 욕심이랄까, 이기심이랄까, 혹은 초현실적인 예술에 대한 동경이랄까, 그런 습기가 몸에 차오르면 심장박동 수가 빨라지고 혈압이 올라가는 습도계. 오래된 습도계의 숫자판에는 0%에서 100%까지 수치가 적혀 있고 100이란 숫자에 가까울수록 눈금 간격이 좁아져서 무언가 긴박한 느낌을 준다.’ p. 84
소중한 사물이란 공통점이 있는 장현웅, 장희엽 형제의 『사소한 발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는 같으나 이 책은 독일의 문화와 예술이 담겨있다. 해서, 더 의미 있는 것이다. 헤세의 알프스 도보 여행기 『방랑』, 100여년 전 독일 신부가 만난 조선을 담은 책 『고요한 아침의 나라』, 파울 클레의 『소묘집』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다.
책을 읽는 동안 잠자던 내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공간을 깨우는 괘종시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가 아끼던 그릇을 수납하던 찬장, 바느질로 수를 놓아 만든 광목 옷커버, 항상 쪽머리를 고수하던 할머니의 비녀, 낡고 오래된 나무실패가 흑백 사진으로 떠오른다.
오래된 것도 새 것이었던 시절이 있다. 새 것은 곧 헌 것이 되며 시간이 지나면 오래된 것이 되는 것을 우리는 잊고 산다. 오래된 것들, 그들만이 가진 향과 색이 있다는 걸 그것들이 사라지고 난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그것들이 그리운 건 그 속에 담겼을 내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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