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세계적인 작가이자 마라토너로도 유명한 하루기에게 달리기와 글쓰기는 동일시된다. 달리는 행위, 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인지하며 그는 몸에 새겨진 실질적인 감각을 작품으로 조직해 나간다. 현대 도시인에게 달리기 열풍은 단지 건강상의 이유만은 아니다. 만족감은 생물학적 본성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달리기가 현 인류의 조상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물학자 브램블과 리버만의 주장에 따르면 달리기는 인간과 원숭이를 가르는 기준점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걷기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나무에 매달려 돌아다니는 원숭이와 다름없었다. 따라서 걷는 능력이 인류 진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화의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란 얘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은 결국 오래 달릴 수 있는 신체구조를 선택하게 되었으며 달리기는 인류의 진화에 큰 몫을 한 셈이다.
노르웨이 작가이자 민속학자인 토르 고타스는 ‘러닝’(책세상)에서 달리기라는 코드로 인류의 역사와 삶을 들여다본다. 원시시대, 고대사회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두루 섭렵하며 인간의 또 다른 역사를 써내려간다. 2000년 전 신의 계시자로서 생명력과 통치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도시에서 도시로 달려 행사에 참석했던 고대 수메르왕, 메시지나 물건을 반나절이면 그 어느 산골짝에서도 태양의 아들 왕에게 전달할 수 있었던 잉카의 전령의 얘기는 달리기에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온갖 위험과 두려운 자연 앞에서 무기력했던 고대 세계에서 전령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대단했다.
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위대한 의식이었던 고대 그리스의 달리기와 주자의 영웅담, 이국적인 스포츠로서의 달리기를 관람자로서 즐겼던 로마인, 외교적인 면책특권까지 갖고 전쟁터를 가로지를 수도 있었던 전령들의 이야기는 달리기의 다양한 사회적 공적 기능을 보여준다.
1700년께 이르러 독일에서는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전갈을 들고 뛰는 전령의 시대가 종말을 맞는다. 도로 사정이 개선되고 말을 이용한 소통수단이 발전하면서 점점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 18세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수많은 전령이 일자리를 잃었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그 직업은 거의 소멸됐다. 대신 경주가 생겨났다. 빈에서는 1822년부터 매년 5월 1일 프라터 공원에서 달리기 경기가 열렸다.
이제 달리기는 패션이자 포즈다. 방만한 얘기를 맥락을 지어 엮어간 솜씨가 놀랍다.
이윤미 기자/ 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