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의 숲은 셀 수 없이 수많은 낙엽의 색과 물질감이 너무나 깊고 풍부하고 아름다웠다. 빛과 나뭇가지가 만드는 수많은 그림자, 아름다운 나무의 모습, 청명한 바람과 차갑고 맑은 공기가 그 때 내겐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때 내 머릿 속엔 온통 짐승들 뿐이었다. 숲에서 동물을 발견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도배했었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동물의 흔적을 쫒거나 우리에게 뭔가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 숲의 구석구석을 헤맸다. 우린 힘들지 않았고 매우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놀다 보면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도 모르게 주변이 어둑어둑해졌고 숲 속에서의 어둠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우리를 삼킬듯 덤벼들었다. 그것들이 우리 주변으로 스며들 땐 낮의 숲의 아름다움과 풍부함은 오간 데 없고, 우리 마음에는 짐승에 대한 열정도 서서히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그 두려움은 느리지만 거대하고 어린아이인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인 어떤 것이었다. 주변은 어느새 아주 미미한 빛만이 남아 겨우 나뭇가지의 형태만이 감지되는 상태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밤하늘의 별과 별 사이의 검푸른 공간과 같은 질감의 비현실적 공간이 내 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어둠 안에서 격정과 두려움을 느꼈다. 심장이 빨리 뛰었고 오직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둠이 우리를 삼키려 할 때 우리는 부리나케 산을 내려와야 했다.
형과 나의 마음은 갑자기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격정적이 됐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깊은 어둠의 산을 서둘러 빠져나와 포도밭을 지나 흙길을 지나 이윽고 다다른 흰 시멘트 길에 발을 내딛었다. 아, 반가웠고 안심이 되었다.
빈 손으로 내려온 우리는 동네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향했다. 좀 전의 우리를 엄습했던 두려움은 서서히 사라졌다. 형과 나는 집에 도착해 조금 전 일은 다 잊고 평소처럼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저녁을 식구들과 먹고, 9시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안방에서 할머니 젖을 만지며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 글, 그림= 문성식(화가) >
▶집요할 정도의 세밀한 필치로 우리 주위의 자연과 도시, 그리고 인간을 낱낱이 그려온 문성식 작가(31)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과 동 대학 전문사과정을 마쳤다. 그의 그림은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범상치 않다. 자의식과 고집이 강하게 담겨 관념적인가 하면, 서사적이거나 철학적인 그림도 많다. 특히 인왕산의 밤을 그린 작품 ’밤(night)’은 한낮에 빛을 발하다가 저녁무렵 하나둘 어둠을 품어가는 수만개의 잎새 하나하나를 일일이 검정으로 칠한 역작으로, 분명히 존재하지만 만질 수도,볼 수도 없는 어둠의 숭고함을 직조해냈다. 이렇듯 문성식의 명상적인 그림 중에는 추상화와 맞닿은 것이 여러 점이다.
문성식은 어린 시절 자신이 경험했던 사건들과, 현재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불편한 풍경을 조각조각 재조립함으로써 삶과 죽음, 도시와 자연, 생성과 파괴의 간극에 대해 끝없이 질문한다. 사실과 대상을 기계적으로 나열하기 보다는, 절실했던 경험과 기억들을 촘촘히 배치함으로써 시퍼렇게 날이 선 그림들은 몹씨 불편하면서도 이 세상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어 아이러니하다. 결국 문성식의 그림들은 회화가 닿을 수 있는 한 정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성식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풍경의 초상’이란 타이틀로 회화와 드로잉 50여점을 모아 개인전(4월17일까지)을 열고 있다.
<어린 시절 형과 함께 토끼를 잡으려 뒷산 깊숙히까지 올랐다가 어둠에 쫓겨 황망히 하산했던 기억을 그린 문성식의 ‘숲과 아이’. 아름드리 나무숲 사이로 잦아든 어둠과, 어린 소년을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연필 드로잉으로 세밀하게 표현했다. >
<문성식의 연필 드로잉 ‘별과 소쩍새 그리고 내 할머니’. 각별히 가까왔던 할머니의 죽음을 독특한 정조로 그려낸 역작이다.>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이영란 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