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테로 족 여행기
가슴에는 열정을 담은 리얼리스트, 체 게바라가 모토바이크로 중남미를 여행하면서 혁명가의 꿈을 키웠다면, 난 20세 때 모터바이크로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회화를 통해 미학적 영감을 얻기 시작했어. 안데스 산맥 근처의 시골 촌놈이 그곳에서 옛 거장들의 기법을 익혀가며 눈이 높아져 갔지. 마티스의 마법과도 같은 색감이, 구성은 천재적인 피카소 정도? 그리고 내 붓에선 반 고흐의 완벽한 붓질이 나오길 원했어. 욕심이 지나쳤다고? NO~! 젊을 때는 누구나 훌륭한 것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싶어하잖아. 그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야 나만의 미술적 감각을 잡을 수 있었지. 예술가는 자신만의 영역이 확고해져야 보편적이 될 수 있거든. 먼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할 거야. “왜 뚱뚱한 사람만 그립니까? “ 그리고 난 항상 똑같이 대답하지. “난 뚱뚱한 사람을 그리지 않습니다. “라고. 내가 상당한 글래머만을 좋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NO! 그건 아니야. 변형된 형태와 부피감에 집중한 것이 ‘보테로 족’이라 불리는 과장되게 뚱뚱한 인물로 보이는 것일 테지.
꼭 소인국의 세계에 도착한 걸리버처럼 보테로 족에 비해 사물은 너무나 아기자기해. 헌데, 걸리버가 대인국 세계에도 가듯이 보테로 족 뚱녀도 다른 세계로 여행을 가지. <생일 축하합니다, 1971>에서 그녀는 63빌딩보다 거대한 생일 케이크의 꼭대기에 꽂아있기도 하고, 보테로 족 여인이 소인국 남자의 세계로 건너가 그와 연인이 되기도 하거든. 식빵처럼 부푼 거대한 여자가 옷을 벗고 있고, 소인국 남자가 이불 속에서 애처롭게 웅크리고 있는 <연인들, 1969>의 그림. 이탈리아의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이 거대한 여성이 브래지어를 벗고 욕조에 머리를 담글 때, 최선을 다해 도망가겠다고 하더군. 하하. 내가 그린 투우는 피의 잔인함이 사라지고, 군사정부 독재자의 나쁜 구석은 사랑스러운 그림 안으로 숨겨져. 그래서 그런지 어떤 비평가들은 여기서 심각한 철학적 에세이를 찾으려 머리를 쥐어뜯곤 해. 한가지, 힌트를 주자면, 라틴아메리카에서 ‘뚱뚱함’은 풍요와 생의 즐거움 같은 긍정적 이미지를 의미한다는 거야. 맞아. 내 그림의 중심은 라틴아메리카인들에게 있는 풍요롭고 즐거운 삶에 있어. 하지만, 실제 그들이 살고 있는 척박한 현실과 다르다고? 맞아. 그건 분명히 삶에 대해 갖고 있는 그들의 영혼에 존재하지.
Ball in Colombia (콜롬비아의 무도회, 1980) |
위인들의 공통된 특징은 뭘까? 바로, 일반인과 차별화된 ‘숭고함’을 추구한다는 거야. 난 그 숭고함에 감탄하면서 위인들의 걸작을 내 방식대로 그렸어. 평생 존경한 벨라스케스의 섹시한 비너스 뒷모습은 <벨라스케스처럼 차려입은 자화상, 1986>에서 그 엉덩이로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뚱녀로 변신했지. 벨라스케스도 이걸 보면 한바탕 웃음을 지르고는 좋아할 거야. 반 에이크, 라파엘로, 다빈치를 따라 그린 그림들은 존경심의 표시였으며, 재창조의 미학이지.
삶은 무조건 즐거워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난 피카소처럼 수많은 여자를 많이도 만났지. 하하. <바를 잡고 있는 발레리나, 2001>에서 그녀는 이만기 다리보다 더 무거운 발을 들어 올리며 발레연습을 하고 있어. 현실에서는 우습기만 한 일이지만, 보테로 족의 여행에서는 가능하기에 즐겁지. 처음 내 그림을 마주하면, 웃을 거야.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혹은 살포시 미소를 쪼개며. 눈살을 찌푸릴지도 몰라. 마른 여성이 ‘아름답다’라고 정해놓은 세상의 원칙. 하지만, 난 ‘아름다움’의 원칙에 반대해. 아름다움이란 정해진 기준이 있을 수 없거든. 제법 많은 보테로 족을 자꾸만 들여다 보면, 일요일에 마시는 ‘따뜻한 코코아’라는 미적 입맛을 갖게 될 거야. 수많은 원칙이 존재하는 골치 아픈 세상에서 풍요로운 보테로 족의 세계를 만나는 순간, 너의 몸은 코코아 위에 살포시 올려진 생크림처럼 붕붕 떠오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