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있으니까 잘된 게 아니라, 흥행이 잘 되는 감독님 영화에 제가 낀거죠. 뭐. 저는 날로 먹었어요.”(배우 정재영)
강우석(51)은 자타공인 한국영화의 ‘구원투수’다. 야구식으로 말하자면 구단주이자 감독인 그가 팀의 간판으로 내세운 4번타자는 배우 정재영(41)이다. 둘이 합작한 ‘실미도’와 ‘강철중’ ‘이끼’ 등 3편의 영화가 동원한 관객만 얼추 2000만명이다. 바깥은 한파가 몰아친 한겨울 서울 충무로 시네마서비스의 사무실, 벽 한면을 장식한 ‘실미도’의 포스터에는 설경구와 안성기 뒤로 흐릿하게 ‘아웃포커싱’된 정재영의 얼굴이 보였다. 2003년 당시만 해도 넘버3였던 그가 ‘강철중’의 넘버2를 거쳐 ‘이끼’와 ‘글러브’를 통해 강우석 사단의 ‘거포’로 섰다.
영화 '글러브' 감독 강우석, 주연배우 정재영.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
“2002년말에 장진 감독이 꼭 보러 오라고 해서 ‘웰컴투동막골’ 연극을 보러 갔는데, 눈에 확 들어오더라구요. 캐스팅하러 간 것은 아니었지만 분장실에 가서 ‘같이 하자’고 했죠.”(강)
“감독님이 몇 년간 충무로 파워 1위를 하실 때였죠. 나는 아웃사이더인데 왜 나한테 시나리오를 주실까 했어요. 기대반 의심반이었지만 무조건 하자 했죠.”(정)
그렇게 주류의 대표 흥행감독과 ‘마이너리그’의 배우간 첫 만남이 이뤄졌고, 정재영은 ‘안성기-박중훈-설경구’로 이어지는 강우석 사단의 ‘4번타자’ 계보를 받았다.
“불을 뿜듯 연기를 같이 만들어가는 배우를 만날 때 감독은 신이 나죠. 저는 이미 완성된 스타일보다는 더 많은 것을 끌어낼 것이 있는 배우를 선호합니다. 매번 다른 영화에 다른 인물을 보여준다면 20, 30년은 같이 못 가겠습니까?”
영화 ‘글러브’는 정재영이 70대의 악마적인 인물로 열연을 보였던 ‘이끼’ 촬영 중 캐스팅이 결정됐다. 강우석 감독이 “한 작품만 더 하고 헤어지자”고 했고, ‘글러브’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정재영에게 던졌다.
포수가 사인하면 투수는 꽂아 넣고 감독이 지시하면 타자는 친다. 영화 ‘글러브’(20일 개봉)에서 강우석과 정재영이 딱 그렇다. ‘글러브’는 음주폭행으로 물의를 일으킨 왕년의 프로야구 최고 투수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청각장애고교인 충주성심학교의 야구부코치로 가 학생들과 함께 뒹굴며 이뤄내는 기적의 드라마를 그린 영화다. 성격이 삐닥하고 고약했던 주인공이 패배의식에 젖은 아이들과 함께 성장해가는 과정이 관객을 웃게도 울게도 한다. 야구명문고에 대패한 충주성심고 야구부원들을 향해 정재영이 “마음껏 소리질러 보라”고 응어리를 토하듯 폭포수같은 대사를 쏟아내는 장면은 벌써부터 회자되는 이 영화의 백미다. 몇 차례 이어지는 ‘눈물세례’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스럽게 던져지는 농담과 유머다. “지나친 엄숙주의나 진지함은 관객을 부담스럽게 하고 감동을 바래게 한다”는 강우석 감독의 리듬감과 잼ㆍ카운터펀치 모두 능한 정재영의 연기력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돌아가며 관객의 가슴에 크고 작은 파문을 만들어낸다.
강우석 감독은 지난해 스포츠영화 ‘블라인드 사이드’ 이야기를 유독 자주했다. ‘인빅터스’의 클린트이스트우드도 그와의 대화에서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이것이 마치 주문이라도 된양, 그의 영화는 단순해진 대신 깊어졌고, 명쾌해진대신 풍요로워졌다.
연말연초 웃음과 눈물을 내세운 영화들이 강세를 보이며 잔혹극에 지쳐 변화를 바라는 ‘객심’이 뚜렷해진 요즘, 가슴찡한 스포츠휴먼드라마를 들고 나온 강우석 감독에게 “운이 좋은 건지 선견지명인지 유행과 딱 맞아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심심치않게 들린다.
정재영은 “감독이기 이전에 부지런한 관객이기 때문”이라고도 했거니와 “오늘 아침에도 동네 목욕탕에서 아저씨들과 눈인사로 하루를 출발했다”는 말처럼 현장 밖 강우석의 자리는 ‘디렉터스 체어’가 아닌 ‘대중’ 속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강우석은 차기작으로 “요즘 정치와 현실을 풍자할 수 있는 사극이 하고 싶다”고 했고, 정재영은 전도연과 ‘카운트다운’의 촬영을 시작했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