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관료가 로펌에서 하는 일은 대부분 전관예우를 지렛대로 한 로비다. 오랜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한 자문은 듣기 좋은 말일 뿐이다.
모 경제부처의 한 현직 국장은 말한다. “제가 모셨던 전 장관님으로부터 오는 전화의 대부분은 민원이죠. 모른 척하기 어렵습니다.” 전관예우. 나중에 자신도 그들과 같은 ‘신세’가 될 텐데 후배들이 모르는 척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안 될 일이 될 일로 바뀌고, 서민은 꿈도 못 꿀 수억원의 연봉이 오간다.
비틀린 전관예우의 그림자가 우리나라 공직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다. 요즘 로펌에서 가장 인기 높은 전직 관료는 공정거래위원회 출신이다. 막대한 과징금은 대개 송사를 통해 조정되곤 한다. 그들이 인기 높은 이유다. ▶관련기사 3·10면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한 전직 고위 경제관료는 정동기 감사원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이 불편하기만 하다.
“퇴직 관료들이 대형 법무법인에서 받는 연봉은 엄청납니다. 로펌에서 그냥 돈을 주겠습니까. 전 고위공직자들은 로비스트 역을 맡아 밥값을 합니다. 후배 공무원에게 아쉬운 소리 하면서 버티는 겁니다.
그는 “금융권 CEO를 하다 물러난 경제관료 출신 후배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묻더라”면서 “공직으로 컴백할 꿈이 있다면 대형 로펌엔 자리잡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대형 로펌을 쳐다보지도 않은 전직 관료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퇴직 후 농협경제연구소에서 몇년을 보냈고, 임영록 국민지주 사장(전 재정부 차관)은 금융연구원에서 초빙연구위원으로 세월을 낚았다. 지금 그 길을 얼마 전에 퇴임한 윤용로 전 기업은행장도 같이 걷고 있다. 대가는 그야말로 차비 수준이다. 출근할 사무실, 광범위한 자료 정도가 그들이 누리는 혜택 전부다.
수억원대 연봉의 로펌을 그들이 마다하는 이유는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관급 인사 때마다, 법조ㆍ경제계 비리가 터질 때마다 전관예우 논란이 불거진다. 관련 제도를 고치려 해도 굳건하기만 한 이해관계의 벽을 넘지 못했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지난 2008년 7월 법조계 고위공직자뿐 아니라 기획재정부, 국무총리실 등 일반 고위공직자까지도 로펌 취업을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국회 행정안전위 소위 문턱도 넘지 못하고 2년 반 넘게 계류돼 있다.
김문현 교수(이화여대 법학과)는 “전관예우는 퇴임 이후 공직을 이용하는 것”이라면서 “현재 공직자윤리법에 (전관예우를) 제한하고 있지만 그동안 느슨하게 적용돼 왔고 시행도 잘 안 됐다”고 설명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과 교수는 “(퇴임한) 고위공직자의 상당수는 실무능력보다 로비스트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정식 수의계약을 하면 기록이 남으니 전화 돌리는 일, 기록이 안 남는 일만 한다”고 꼬집었다.
김문현 교수는 “고위공직자 퇴임 당시 직무와 연관성이 없는 곳에 일하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국 교수는 좀 더 강도 높은 처방을 제안했다. “고위공직자의 퇴직 후 재취업 장소와 기간 등을 제약해야 한다”면서 “취업 자체를 제약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윤재섭ㆍ심형준ㆍ조현숙 기자/newear@